20여 분만에 택시에서 내리고 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분은 왜 일면식도 없고 앞으로 볼 일도 없을 나에게 그토록 온갖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리고 나는 왜 그분의 이야기에 집중하는 대신에 마스크만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을까. 왜 그분을 친밀한 인간으로 대하지 못하고 피해야 할 감염원으로만 대했을까. 그리고 자연스럽게 안톤 체홉의 소설 (애수)가 떠올랐다.
(애수)는 어느 눈 내리는 밤, 늙은 마부가 마차에 탄 손님들과 다른 젊은 마부에게 자기 아들의 안타까운 죽음에 대해 이야기 하려 하지만 아무도 제대로 들어주지 않자, 하는 수 없이 짐승인 말을 상대로 아들의 죽음을 들려주며 슬픔을 토로한다는 이야기이다. 아들의 죽음이라는 엄청난 사건 앞에서, 그 압도적인 슬픔 가운데 늙은 마부는 자신의 마음을 누군가에게 자꾸 이야기하고 싶어 하지만 아무도 그의 슬픈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단지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늙은 마부의 마음은 조금이나마 위로받을 터인데도, 사람들은 아무도 타인의 슬픔에 관심을 갖지 않으며 그의 이야기에 제대로 대꾸조차 않는 것이다.
(애수)가 보여주는 것은 타인의 슬픔에 대한 공감과 대화를 통한 위로가 가진 가치이다. 타인에 대한 공감이란 동정과 다르다. 동정이 스스로를 우월한 위치에 세운 채 자신보다 낮은 위치의 사람에게 나타내는, 즉 서로의 타자성에 입각한 감정이라면, 공감은 같은 위치에서 서로의 동일성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나타내는 감정이다. 타인에 대한 동정이 아닌 공감이란, 인간이 인간이기에 서로를 동일시하며 서로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우리의 영역과 타인의 영역 간 관계의 경계를 짓는다. 그리고 같은 우리의 영역 내에서도 누군가는 선배로 누군가는 후배로, 누군가는 친구로 누군가는 지인으로, 누군가는 갑으로 누군가는 을로 구분 짓는다. 이러한 경계와 구분을 통해 우리는 누군가에게는 쉽게 친밀감을 나누거나 사랑이나 존경을 표하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일단의 관심이나 존중조차 나타내지 않는다. 공감의 대화는 이러한 경계와 구분을 넘어 우리가 인간과 인간으로서 교유하는 것을 가능케 하는 힘이다. 다시 말해 공감의 대화를 통해 우리는 자아와 타자, 갑과 을, 선배와 후배, 우리와 저들의 경계와 구분을 넘어서 공통된 감정을 교류하고 서로에게 위안이 될 수 있다.
전염병의 세계적 대유행 상황에서 우리는 종종 타인을 하나의 인간이 아니라 바이러스 감염원으로 대하곤 한다. 타인이 지나간 자리에 그의 이야기를 기억하는 대신에 그의 흔적에 소독약을 뿌려대는 현실 앞에서 우리가 돌아봐야 할 것은 무엇보다 공감의 가치일 것이다. 그가 누구든 무엇을 가졌고 무엇을 하는 사람이든 한 인간에게는 그의 생을 담은 이야기가 있으며, 우리는 그 이야기에 공감함으로써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김주리 한밭대 인문교양학부 교수
<저작권자ⓒ대전일보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