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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가산책] 따뜻한 기억들

2020-12-08 기사
편집 2020-12-08 07:5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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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사진1홍인숙 대전대 교수·시인
어릴 때 살았던 서울 변두리 동네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다. 가끔 낡은 플라스틱 바가지를 들고 불편한 몸으로 대문 앞에 서 있곤 하던 아주머니가 계셨다. 언제나 오그라진 오른쪽 손은 옆구리에 붙인 채 다른 한 손에 든 바가지에 찬밥을 얻어가는 분이었다. 돌아설 때마다 어눌한 인사를 빠뜨리지 않는 아주머니가 한쪽 발을 끌면서 동네 끝으로 걸어가는 모습을 보면 괜스레 마음이 아프곤 했다. 어느 날부터 엄마 모르게 아주머니에게 드릴 밥을 따로 놔두었다가 내드리곤 했는데, 그럴 때면 얼굴에 살짝 홍조가 비치는 것도 같았다. 풍이 오기 전에는 그럭저럭 살아가던 분이라는 말이 들렸는데 아마도 병으로 인해 혼자 남겨져 구걸에 나선 게 아닐까 짐작할 뿐이었다. 날마다 동네를 지나갈 때면 어딘가 점잖은 기색이 있는 분이었다. 동네 사람들 누구도 아주머니를 함부로 대하진 않았던 것 같다. 나는 왠지 그분이 좀 안됐다는 생각을 오래 떨쳐버리지 못했다.

우리 집 옆으로 건너 건넛집에는 '병아리 엄마'라고 불리던 수더분한 아주머니가 한 분 사셨다. 결혼한 지 십여 년이 넘었다는데 자식이 없는 분이었다. 어느 때인가부터 아주머니는 노란 병아리를 몇 마리 키우기 시작했다. 하굣길에 지나면 병아리들을 몰고 집 앞에 나와서 이웃분들과 한담을 나누는 게 일상이었다. 신기하게도 병아리들은 금세 자라는 듯싶었다. 조금 큰 약병아리가 되자 제법 활개를 쳤다. 밖에 내놓으면 제멋대로 돌아다니는데 아주머니는 말 안 듣는 애들 나무라듯 지청구를 하면서 닭들을 쫓아다니기 바빴다. 그렇게 병아리들과 놀다가도 동네에 아기를 업고 나오는 새댁들을 보면 항상 함박웃음을 지으며 포대기를 뺏듯이 대신 업어주곤 했다. 그 아주머니는 마흔 중반을 훨씬 넘기고서 예쁜 딸을 하나 낳았다. 그러는 동안 동네 사람 누구도 섣부른 위안의 말을 꺼내거나 등 뒤에서 숙덕거리는 말 한마디 없이 함께 어울려 가며 잘 지냈던 것 같다.

우리 집은 살기에 썩 넉넉한 형편이 아니었는데 아버지는 가끔 호기를 부리시는 일이 있었다. 어느 해인가는 설 명절 전날 아버지께서 떡가래를 한 광주리나 담아 동네에 돌리신 적도 있다. 나는 의아해하면서도 다른 집에 뭔가를 나누어 준다는 생각에 왠지 어깨가 으쓱해서 아버지 뒤를 따라다녔다. 아버지는 월남하시기 전 당신의 기억에 남은 평양 부잣집 외동아들로서의 모습을 종종 호출하시는 듯싶었다. 어느 날에는 집안 형편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전축을 턱 들여놓아 어머니가 끌탕을 하신 일도 있다. 아버지는 뭔가 풀리지 않는 날이거나 기분이 거나해지는 날에는 음악을 틀어놓고 맏이인 나를 부르셨다. 아버지의 발등 위에 올라서게 하시고는 내 손을 붙잡아 이리저리 뻗치며 방안에서 빙글빙글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시곤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베사메 무쵸'라는 노래였다. 영어 노래인 '클레멘타인'을 가르쳐 주시기도 했다. 안쓰러우면서 밉기도 했던 아버지는 너무나 오래전에 먼 곳으로 떠나셨다.

가난한 서울 변두리에서 살았던 10대는 고단하고 서러웠으나 비 올 때 함께 젖는 지붕이 있었고, 바람 불 때 같이 울던 전신주가 있어 견딜 만했다. 소복이 쌓인 눈을 밟으며 교회 오빠들이 커다란 자루를 메고 앞장서면 어린 우리들은 하얗게 덮인 담장 위의 눈을 쓸어가며 즐겁게 새벽송을 돌던 성탄절이 있어서 행복했다. 사람을 돌아보는 마음, 나누며 풍성해지는 마음, 쓸쓸해서 더욱 깊어지는 마음을 가르쳐준 따뜻한 그 기억들이 살아가는 힘이 되었다. 홍인숙 대전대 교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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