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동현 우송대 엔디컷칼리지 석좌교수
손동현 우송대 엔디컷칼리지 석좌교수
서양에서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정체(政體), 즉 정치 형태에 대한 논의는 무성했다. 그 유형의 구분은 권력 주체가 누구냐, 몇 사람이냐에 따라 이뤄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1인의 군왕이나 황제가 권력을 전유해 통치하는 것이 군주정치(mono-archo)이고, 소수의 귀족 집단이 권력을 공유해 통치하는 것이 귀족정치(aristo-cratia)인 반면, 모든 국가 구성원이 주권자가 되는 것이 민주주의(demos-cratia)이다. 그런데 이 모든 정치 형태는 그 권력의 주체가 양식과 도덕성을 기초로 해 국가구성원 전체의 안녕과 번영을 위해 국정을 운영할 때는 순기능을 하나, 그렇지 않고 국익이나 공익을 구실로 해 사익이나 집단의 이익을 도모하고자 할 때는 모두 전제정치(auto-cratia), 과두정치(oligos-archo), 중우정치(ochlos-cratia)로 타락한다.

문제는 겉모습만 민주주의 무늬를 띤 사이비 시뮤라크르 민주정치가 횡행한다는 것이다. 대체 겉모습과 실상, 현상과 본질의 관계에 대해선 끝없는 철학적 논쟁이 있어왔지만, 이 아포리아에 가까운 문제를 이론적으로 풀어보려는 것은 무망한 일이다. 보드리야르가 예고했듯이 이른바 매스컴이 디지털 기술에 힘입어 얼마든지 현상을 본질로 역전시키는 일이 가능해진 오늘날, 이 문제에 있아선 실천적 현실만이 답이다. 본질이 현상으로 드러나게 할지, 본질은 외면한 채 현상만을 꾸미려 할지, 그건 정치에서 실천적인 문제일 뿐이다. 후자를 취할 때 민주주의를 가장한 독재정치가 실현되는 것이다. 그게 바로 중우정치를 기반으로 하는 독재정치다. 민중을 속여 민중의 편에서 민중의 뜻에 따라 민중의 권익을 실현한다고 기만함으로써 독재정치를 하는 것이다. 민중이 어리석으면 이게 가능한 것이다.

일찍이 19세기 중반에 이미 프랑스의 정치학자이자 정치가였던 톡크빌이 호평했던(1835) 미국의 민주주의에도 이런 증상이 나타난다. 비록 재선에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예상치 못했던 돌풍을 일으키며 대통령에 당선됐던 트럼프의 정치적 술수를 소개한 한 비평가의 주장을 보면 섬찍한 느낌마저 든다. 남의 일 같지가 않다. 다이아몬드(L. J. Diamond)라는 사람이 분석한 트럼프의 득표를 위한 선거전략은 이렇다. 0. 전체 국민을 진짜 국민과 부패한 엘리트로 나누어라 1. 반대편을 불법적이고 반애국적이라고 악마화하기 시작하라 2. 사법부의 독립성을 훼손하라 3. 언론의 독립성을 공격하라 4. 모든 공영방송의 통제권을 장악하라 5. 인터넷의 통제를 강화하라 6. 시민사회의 다른 요소들(시민단체, 대학, 특히 반부패 및 인권단체)을 제압하라 7. 경제계를 겁주고 협박하라 8. 우리에게 충성하는 새로운 계층의 정실 자본가들을 살찌워라 9. 공무원과 안보 기관에 대한 정치적 통제력을 확고히 하라 10. 선거구를 유리하게 만들고 선거룰을 조작하라 11. 선거를 주관하는 기관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하라. 12. 이상의 11 단계를 반복하라 (<윤순봉의 서재>에서 재인용)

이쯤 되면 이건 곧 히틀러 캠프의 괴벨스가 기획 운영했던 전략 아닌가. 대명천지 21세기 미국 사회에서도 민주주의로 위장된 독재, 무력적 요소는 전혀 없는, 그래서 부드럽다고 표현하는 `연성 독대`가 가능하단 말 아닌가. 대의 민주주의, 이것도 믿을만한 게 못 된다. 디지털 기술로 더욱 정교화되고 광범해지고 강력해진 시뮤라시옹 기만 술책에 넘어가면, 민주적인 방식으로 강력한 독재가 등장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니 너무나도 진부한 말로 들리겠지만, 도덕적 기반을 상실한 정치는 제아무리 실정법적인 민주주의 요건을 충족시켰다 하더라도 바른 정치(正治)가 될 수 없다. 사이비 민주정치, 무늬만 민주주의 모양으로 포장된 시뮤라크르 민주정치에 국민이 속지 말아야 한다. 손동현 우송대 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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