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병목 국립문화재연구소장
지병목 국립문화재연구소장
지방을 지나다 `ㅇㅇ역사의 고장, △△`이라는 문구를 간혹 볼 수 있다. 그 지역이 과거의 어떤 나라나 인물들과 관련된 곳이어서, 지역의 역사성을 부각시키고 후손으로서의 자긍심을 높이기 위함일 것이다. 경주나 부여의 경우는 너무도 대상이 명확하다. 지역의 역사적 정체성을 부각시키고, 이를 지역 축제로 발전시키는 곳도 많아졌다. 지역을 홍보하고 관광지로 활성화 시키는 데 있어 이른바 역사 스토리텔링(storytelling)은 아주 중요한 수단이다. 몇몇 고장에서는 톡톡히 효과를 거두고 있다. 더 나아가서 지역유산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려는 노력도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서울 광진구와 경기도 구리시에 걸쳐 있는 아차산 일대에서 5-6세기 경 고구려의 방어시설인 보루堡壘)가 발굴돼 이목을 끌었다. 이런 이유로 해당 지자체들은 고구려와 관련된 많은 투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지역 축제를 열고, 고구려와 관련된 행사나 조형물들을 만들어 이 땅이 한때 고구려의 영역이었음을 자랑하고 있다. 이 지역은 역사적으로 어떤 곳이었던가. 기원 전후 무렵부터 백제 건국의 중심지였으나,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시절인 5세기 무렵 고구려 땅이 됐다. 그러다 백제와 신라 연합군이 빼앗은 이 땅을 놓고 다시 백제 성왕과 신라 진흥왕 사이에 목숨을 건 전투는 이후 우리 역사의 향배(向背)를 가르는 중요한 사건이 됐다. 살펴보면 고구려가 이 지역을 실질적인 영역으로 차지했던 기간은 100년 남짓도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구리시에 가면 백제나 신라보다는 고구려 관련 상징물이나 시설들이 더 눈에 띈다. 구리 쪽 아차산 자락에 만들어 놓은 `고구려 대장간마을`은 많은 사람들이 찾는 명소다. 그런데 시의 중심부에는 광개토대왕 광장이 있다. 광장 안에는 10m가 넘는 웅장한 광개토대왕의 동상이 세워져 있고, 그 옆에 6.4m에 달하는 실물 크기의 복제된 광개토대왕릉비가 서 있다. 마치 이곳이 고구려의 수도였던 적이 있었던가 하는 착각에 빠졌다고 하면 비약일까.

몇 년 전부터 가야사 연구가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았던 가야사 연구가 활성화되고, 여기저기서 가야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고 있다. 균형적 역사연구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이는 긍정적이다. 많은 지역에서 너도나도 가야와의 관련성을 주장하고 관련 행사나 사업들을 추진하고 있다. 우리 역사를 바로 알고자 하여 그와 관련된 흔적을 찾는 일에 열정을 보인다는 측면에서 보면 반가운 일이다. 다만 역사에서의 영토(혹은 영역)와 문화권(文化圈)의 차이점에 대해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옛날의 국경선은 지금처럼 철책으로 가로막혀 있지도 않았고, 지도에 명확한 국경선이 표시된 경우도 드물었을 것이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두 나라가 대립했으며, 엎치락 뒤치락 하며 그 경계는 다분히 유동적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가야의 흔적이 남아 있다고 모두가 가야 땅은 아니다. 변방의 백성들은 어느 때는 이 나라 관리가, 어느 때는 저 나라 관리가 와서 영유권을 주장하며 세금을 거둬가는 데 익숙해졌을 것이다. 아마도 우리 조상들은 비상시국이 아니면, 이웃 나라를 넘나드는 데 그리 큰 제약을 받지 않은 듯하다.

전남지방에는 커다란 항아리를 무덤의 관으로 사용했던 시기가 있었다. 이들의 사용집단은 `마한(馬韓)`이라는 정치체였다. 그런데 이 마한이 언제까지 존재했는지를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 영산강 유역에 늦은 시기까지 마한이 독립적인 정치체로 있었다거나, 비교적 이른 시기에 백제에 정복돼 백제의 지방화가 되었다고 보는 관점도 있다. 학설의 다양성은 존중돼야 한다. 그러나 영토의 역사주의가 자칫 현재를 사는 사람들까지 편 가르기 하는 분위기로 흐르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 지역의 정체성은 어느 특정 시기의 역사적 위치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전체 시간 흐름의 맥락 속에서 차지하는 의의도 함께 살펴야 한다. 또한 다른 시기와의 균형적 평가도 잊지 말아야 한다. 어느 하나를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더 많은 소중한 것 들을 놓치는 오류를 범할 수 있으니까. 지병목 국립문화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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