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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밭춘추] 그려진 그림

2020-11-27기사 편집 2020-11-27 07:0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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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사진1캐리리 작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머릿속 생각들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손은 쉽게 멈추지 않는다. 그렇게 문득 시작된 낮 속에서 밤새 맥락을 잃어버린 손의 감각들이 움직이다가 멈추고, 멈추다가 움직이기를 반복하면 새로운 생각들이 고이기 시작한다. 대부분의 작가들은 떠오르는 생각을 드로잉을 통해 확인하고, 본격적인 작업을 시작한 뒤에 결정은 머리가 아닌 손에 의지한다. 예전처럼 기술적인 그리기 능력이 곧 예술로 받아들여지던 시대는 지났지만, 여전히 예술가의 손은 죽어가는 정신적 세포들을 깨워주는 가장 훌륭한 도구이자 가장 먼저 생각을 기록하는 곳이다.

그렇게 의식의 흐름과 함께 움직이는 손은 종종 예상치 못한 결정을 하며 낯선 작품을 만든다. 보통 나처럼 생각이 곧 작품이 되는 경우는 손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빈 캔버스 위에 새로운 형상들이 생성될 때, 마침내 나만의 공간으로 확실하게 들어온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럴 때마다 바쁘게 움직이는 손이 고맙기만 하다. 그 때문인지 나는 손의 감각이 묻어나는 조각이나 설치작품, 특히 그냥 '그려진 그림'이 좋다. 하지만 아트페어와 같은 상업적인 전시 공간에서 손의 흔적이 살아있는 작품을 보기는 영 쉽지 않다. 전시장에 들어선 적지 않은 사람들이 흡사 유광 코팅을 한 듯 반짝거리는 바니시(varnish)가 발린 작품들을 보고서는 화려함을 느끼며 감탄한다. 아쉽게도 내겐 그들의 광택이 마치 화려한 명품으로 온몸을 휘감은 듯한 모습처럼 다소 과하고 부담스럽게 느껴진다.

결국에는 작가가 자신의 작품이 사람들에게 어떤 인상으로 기억되길 원하는지에 대한 문제다. 나에게 있어서는 작품이 상업적으로 잘 팔리고, 잘 팔리지 않는 것이 크게 중요치 않다. 현대 미술시장에서 아무리 잘 팔리는 작업이 좋은 작업이 아닐 수 있고, 좋은 작업이 잘 팔리지 않을 수 있다. 그 때문에 내 작품이 누구에게 '어떤 인상으로 남는지'와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가 더욱 중요하다. 비록 화려하지도 반짝이지도 않는 그냥 그려진 그림 일지라도 자연스럽고 꾸밈없는, 솔직한 작품을 만들고 싶다. 그저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은 자유분방함 속에 손의 감각이 살아있는 작업을 하고 싶다. 캐리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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