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명식 푸른요양병원장
강명식 푸른요양병원장
초등학교시절에 분식의 날이 있었다. 일주일 중 하루를 정해 분식을 먹는 날이었다. 나라에서 날을 정해 국수 같은 분식을 먹어야 했다. 식량이 부족한 나라사정으로 생긴 정책이었다. 그 외에도 잡곡밥을 먹도록 권장했고 그렇다 보니 흰쌀로만 지은 밥을 먹는 것이 죄를 짓는 듯 한 마음이 들기도 했던 시절이었다. 이 모두 나라의 식량부족을 이겨내려는 정책이었다. 이는 한편으로는 그만큼 먹고 살기 어려운 시기였음을 보여준다. 그 후 한국의 산업화가 진행됐고 물건들을 품질에 상관없이 마구 만들어내 수출하는 시기가 된다. 이 시기는 한국산(made in korea)이라면 복제품, 싸구려, 삼류로 인식되던 시기였다. 그로 인해 외제라면 모두 선호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물론 당시엔 우리의 기반시설, 자본력, 기술력이 선진국에 비해 매우 떨어지고 상당히 낙후되어 그렇게라도 만들어 수출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생각하던 시기다. 품질은 제쳐두고 빨리 많이 만들어 수출하기 바빴다. 그렇다 보니 대한민국이 싸구려품질, 덤핑의 대명사이던 때도 있었다. 그런 때가 그리 먼 옛날이야기가 아니다. 길어봐야 30-40년 전 일이다.

그랬던 대한민국이 이제는 IT, 가전, 반도체 등 여러 부분에서 세계 1위이며 글로벌 초일류로 진입했다. 여기에 `삼성`이 있다. 변방이었던 대한민국을 세계 정상으로 끌어올린 기업이 삼성이라고 해도 그다지 틀린 말은 아닐 거다. 대한민국 과 삼성은 운명공동체로 봐도 틀리지 않다. 이런 세계초일류 기업을 만들어낸 이건희 회장이 별세했다. 이 시대의 선각자이며 선지자인 영웅을 잃은 것이다.

필자의 아버지는 치매로 여러 해 고생하셨다. 돌아가실 때까지 수년간 몹쓸 병을 앓았다. 마지막이 가까워 왔을 때는 인간의 인지능력은 거의 없었고 매우 단순하고 기본적인 본능으로 살아갔다. 그의 기억은 점차 극소수의 가족으로 제한되었다. 수년의 투병 후 조용히 눈을 감으셨지만, 임종 후에 내 가슴은 텅 빈 듯했다. 수개월간 허전한 마음을 추슬러야 했다. 아버지는 어려운 환경에서 가족을 부양하고 가문을 일으킨 분이셨다. 나의 영웅이셨다. 한동안 머리에서 흰 영혼이 빠져나간 듯 했다. 멍하고 허전했다.

이건희 회장의 사망소식도 그랬다. 개인적으로 물리적인 직접적 혜택을 입지는 않았지만,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자부심과 긍지를 심어준 나의 영웅이었다. 그저 그런 모방품이나 삼류 제품을 만들던 나라를 세계 최고의 품질국가로 탈바꿈 시켜 놓았다. 우리 5000년 역사 중 가장 급격한 변화의 시기에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으로 초대박을 터트려줬다. 그는 대한민국의 국격을 초일류로 올려놓았고 국민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준 우리의 멘토이며 영웅이었다. 또한 앞을 내다본 그의 생각과 추진력은 엄청난 부가가치를 만들어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었다. 그의 기업가정신은 많은 우리나라 기업의 본보기가 되어 삼성 이외에도 초일류 기업들이 생기게 된 원동력이 되었다. 그는 대한민국에 먹을거리를 제공했다. 그의 혜안으로 IT, 반도체, 스마트폰, 가전 등은 세계일류로 도약했고 이는 나라의 부를 만들었다. 수 십 년 전만해도 끼니를 걱정하던 나라를 굴지의 세계 부국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개인으로 본다면 지지리 살기 어렵던 가문을 일으켜 세운 것이다. 그에게 고맙고 감사할 일이다. 나라의 아버지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그와 같은 선각자, 선지자, 나의 영웅이 새로이 나타나길 기다리며...그의 타계를 애도한다. 강명식 푸른요양병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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