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동현 우송대 엔디컷칼리지 석좌교수
손동현 우송대 엔디컷칼리지 석좌교수
민주주의의 요체는 협상과 타협에 있다는 말을 자주 듣게 된다. 뭔가 잘 해소되지 않는 갈등이 있긴 있는 모양이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 나는 이 말을 들을 때마다 거부감을 느낀다. 물론 내가, 차라리 독선과 아집이 필요한 것이 혼란스러운 요즈음이라는 엉뚱한 생각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해관계가 엇갈리고 이에 따라 사람들 사이에 대립과 반목이 있을 때, 이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우리로서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역시 대화를 통한 협상과 타협이다. 이 방법이 아니라면 결국 남는 것은 싸움 밖에 없을 것이니, 소모적인 싸움보다는 좀 답답하더라도 역시 대화가 더 나은 것임엔 틀림없다. 이 점에 있어서는 나도 전적으로 같은 생각이다.

내가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 협상의 주제에 관해서이다. 한 마디로 말해, 협상될 수 없는 것, 협상되어서는 안 될 일 까지도 협상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그릇된 자세가 못마땅하다는 것이다. 아니, 민주사회에서 협상으로 타결되지 않을 것이 어디 있겠느냐고 반문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것이 정말 생각해 볼 문제다.

협상이란 이해를 달리하는 양편이 가능한 한 어느 한편에 더 큰 이익이 치우치지 않도록 그 적정선에 대해 양편이 다 동의할 때 타협은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협상에 있어서 유일한 원리란 다름 아닌 손익계산이다. 그런데 손익계산이란 `좋고 나쁨`을 재는 것이지, 정당성 여부, 즉 `옳고 그름`을 헤아리는 것은 아니다.

이 두 가지는 일단 서로 구별이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옳지 못한 일을 놓고 아무리 손익계산을 잘 한들 그 손익계산의 결과 취해진 행동이나 결정이 정당성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도덕적 정당성이 이 손익계산의 전제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즉 모든 협상은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이 내려진 연후에 옳은 일을 도모하기 위해 이루어질 때에만 그 의의를 갖는다고 보아야겠다는 것이다. `좋은 게 좋은 거`요, `누이 좋고 매부 좋으면 그만`이라는 불순한 야합의 자세로 나아간다면, 즉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고 그저 `좋음`만을 안중에 두는 자세로 나아간다면, 그 협상은 타협의 내용이 무엇이든 간에 도덕적으로 용인될 수 없는 것이다. 탈세업자와 세무 관리와의 협상이 아주 합리적인 선에서 적정 액수가 정해져 뒤탈 없이 깨끗이 마무리가 되었다면, 그게 합당한 것으로 용인되어야 하겠는가.

사법 체계의 개선을 통한 `정의실현`의 주제 아래 여야 정치인들이 설마 이런 식의 협상을 시도하겠는가. 만에 하나라도 그렇다면, 이는 부릅뜬 눈으로 `옳고 그름`을 가리는 준엄한 역사의 판관 앞에서 이 판관이 내리는 형벌을 받게 될 것이다.

사실 `좋고 나쁨`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옳고 그름`에는 그런 것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 된다. 정도의 차이가 있으니까 좋고 나쁜 것은 계산될 수 있는 것이요, 그러니 이것이 문제라면 협상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옳고 그름은 그렇지가 않다. 옳으면 옳고 그르면 그르지, 더 옳고 덜 그르고 할 수가 없는 일이다. 그러니 `옳고 그름`의 문제에 관해선 계산도 협상도 있을 수 없는 셈이 된다. `옳고 그름`에 관해선 오직 그것을 밝히는 일만이 있을 수 있다. 밝히자니 조사도 하고 청문도 하고 증언도 듣는 것이다. 못 알아 듣는 사람이 있으면 설명·해명을 해서 설복을 시키기도 하지만, 대화라 해서 이것이 협상이 될 수는 없는 일이다.

`옳고 그름`은 인간의 행위와 세계를 질서지우는 가장 근원적인 원리의 문제다. 그것은 사실의 세계에 있어서 `참과 거짓`에 해당되는 것이다. 과학자들끼리 협상을 통해 `참`을 발견해내지 않듯이, 또 협상을 통해 `거짓`을 `참`으로 바꾸어 놓을 수 없듯이, 사회 속에서 도덕적 삶을 살아가지 않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도 협상을 통해 `옳음`을 타결해 내거나, 더욱이 `그름`을 `옳음`으로 바꾸어 놓을 수는 없는 일이다. 손동현 우송대 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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