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병목 국립문화재연구소장
지병목 국립문화재연구소장
동서양을 막론하고 온 세상이 코로나19 라는 괴물로 정상적인 삶을 살기 어려워졌다. 일상의 모습이 너무도 많이 변화하고 있다. 그야말로 불확실성의 시대다. 국가 간 이동은 매우 제한됐고, 일부 나라에서는 봉쇄조치까지 시행한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비교적 철저한 방역과 많은 국민들의 노력 덕분에 아주 극한 상황을 걷지는 않고 있으니 천만 다행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의 행동 또한 많은 제약과 불편이 따르고 있다. 이런 상황이 오래 지속되다 보니 많은 사람들의 갑갑증이 참기 어려운 지경에 이른 듯하다. 공원이나 거리에서 전보다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된다. 얼마 전 보도에 따르면, 조선왕릉의 미공개지역 일부 공간이 시민들에게 개방된다고 한다.

조선왕릉은 서울과 그 주변에 주로 위치하고 있다. 조선(대한제국 포함)의 왕과 왕비, 그리고 왕족 등의 무덤은 120기에 달한다고 한다. 신분에 따라 ㅇㅇ릉(陵), ㅇㅇ원(園), ㅇㅇ묘(墓) 등으로 불리는데, 왕과 왕비의 무덤은 능이다. 조선왕릉은 모두 42기이다. 개성의 제릉(태조의 첫째 부인인 신의고황후의 능)과 후릉(2대 정종과 그의 비인 정안왕후의 능)을 제외하면, 모두 우리가 접근할 수 있는 곳에 있다. 2009년 세계유산으로 등재될 만큼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얼핏 보면 모두가 비슷하지만, 봉분의 숫자나 조성 상태 등 외형적인 특징뿐 아니라, 각 무덤마다 지닌 역사적 연유 등에 조금만 귀를 기울이면 모두가 색다르다. 그냥 무심히 스쳐갈 수도, 경외심을 가지고 대할 수도 있지만, 빠져 들면 들수록 오묘한 매력을 가진 공간이다.

얼마 전 일시적으로 봉분 근처까지 제한적 접근이 가능하다고 발표된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에 있는 태조(이성계)의 무덤인 건원릉 역시 그러하다. 그동안 수많은 사극과 소설, 전언 등을 통해 잘 알려져서 역사에 흥미가 없는 사람들도 그의 족적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 왕릉들의 봉분이 잘 다듬어진 잔디로 돼 있는데 반해 건원릉의 봉분에는 억새풀이 자라고 있다. 말년에 고향 함흥을 그리워하며, 모든 것을 체념한 듯 지낸 태조의 심정을 기리기 위해 (혹은 유언에 따라) 아들 태종이 함흥의 흙과 억새를 가져다가 덮었다는 일화는 잘 알려져 있다. 그런 연유로 건원릉의 봉분에는 억새가 자라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남북 관계가 좋아지거나, 통일이 된다면 함흥의 흙과 억새로 봉분을 재단장해 드릴 수 있을 것인데` 하는 바람도 있다.

조선왕릉을 보면서 떠오르는 또 하나의 인물이 있다. 고려 31대 왕인 공민왕(1330-1374, 재위 1351-1374)이다. 태조 왕건만큼이나 고려시대 왕하면 떠오르는 인물이다. 기울어가던 고려를 바로 세우기 위해 안간힘을 썼던 개혁군주로서, 왕비인 노국대장공주와의 애틋한 사랑이야기와 서화에 능했던 이로, 그리고 말년의 방탕과 비참한 최후까지.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간 공민왕. 아이를 낳다 죽은 부인을 위해 직접 설계하고 지휘하며 7년에 걸쳐 무덤을 조성했다고 한다. 현릉(공민왕)과 정릉(왕비)의 쌍분으로 된 이 공민왕릉의 능제(陵制)가 이후 조선왕릉의 모범이 됐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그러나 이 공민왕릉은 개성시 서남쪽 14㎞쯤에 위치하고 있으니, 당장 가볼 수 없음이 안타까울 뿐이다.

많은 사람이 모이는 밀폐된 내부 공간에서 지내는 일상은 이제 많이 부담스럽게 느껴진다. 청명한 가을 하늘과 맑은 공기를 만끽할 수 있는 탁 트인 야외에서 지치고 힘든 마음을 풀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공간이 바로 조선왕릉일 듯 싶다. 적당한 거리두기와 무심함을 간직한 채 가벼운 마음으로도, 깊은 사색과 역사를 반추하면서도 걸을 수 있는 공간이다. 조선왕릉이, 무덤이라고 하는 을씨년스럽고 부정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삶의 의욕을 찾고 재충전할 수 있는 소중한 공간으로 우리 곁에 있음을 새삼 느낄 수 있는 시간이다. 요즘처럼 죽은 이의 공간이 살아 있는 이들과 함께 호흡하고 힘을 줄 수 있는 장소로 우리에게 다가왔던 적이 없었을 듯하다. 지병목 국립문화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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