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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호사칼럼]막내 며느리의 가을휴가

2020-10-27기사 편집 2020-10-27 15:3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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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사진1이민정 건양대병원 간호부 팀장
아들만 셋인 집안의 막내아들과 결혼한 필자는 여느 며느리와 같이 명절 때면 큰댁을 찾는다. 전날 함께 여러 가지 전을 부치고 차례를 지낼 준비를 하느라 부엌을 떠나질 못한다. 그래도 든든한 형님들 덕분에 막내인 나는 설거지만 잘하면 되지만 몇 번씩 상을 차리고 치우는 명절을 지내는 건 쉽지 않다. 종종 시아버님께서는 며느리들 고생한다고 명절 전날엔 가까운 식당에서 외식을 하자고 하실 때면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 이 기분은 세상의 며느리들은 다 알 거다. 한 끼만 줄여도 얼마나 몸이 편한지 우리 시아버님은 며느리 마음 제대로 알아주시는 센스쟁이시다.

올해도 가을 깊이 들어앉은 10월 초에 추석을 맞이했다. 그런데 올해는 무척이나 고민스러웠다. 코로나로 고향방문이나 가족들의 모임을 자제하자는 뉴스를 접하기도 했고 병원에 근무하고 있는 간호사로서 가능한 질병관리청 지침에 따라야 한다고 생각은 들었지만 나는 집안에선 막내 며느리였기에 그저 눈치만 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에 명절을 일주일 앞두고 시아버님께서 올해는 모두 각자의 집에서 건강하게 추석을 보내자는 연락을 주셨다. 명절이 아니어도 얼마든지 볼 수 있는데 굳이 이런 시기에 고생하고 조심하면서 볼 필요 있겠냐며 올해는 각자 편하게 며느리들 가을휴가를 보내라고 하셨다. 예상치 못한 가을휴가를 어찌 보낼까 기분이 싱숭생숭해졌다. 진짜 가을휴가로 생각해도 될까? 괜히 하시는 말씀 아닐까? 이런저런 생각을 남편과 나누다 말씀 그대로 조용히 안전하게 추석을 보내기로 했다.

나는 생각지도 못한 가을휴가를 보내게 되어 주말을 제외한 3일은 온전히 나만을 위한 시간으로 채우겠다는 나름의 계획을 세웠다. 가을휴가 계획을 세우는 것만으로도 설레는 마음이 들었다.

가을휴가의 첫날, 아침식사 후 집 앞 가까운 산책로를 거닐었다. 입과 코는 마스크를 가리고 귀에는 이어폰을 꽂고 마음껏 가을을 느껴보았다. 평소에는 마주치는 사람들도 종종 있었는데 명절 연휴라 그런지 조용했다. 2시간 남짓 가을을 실컷 느끼고 저녁에는 배달 음식을 먹으며 평소 보고 싶었던 영화도 한편 보고 모처럼의 행복한 하루였다. 좋은 순간 순간을 그냥 만끽하고 즐기면 될 것을 영화를 보면서도 '지금 이 시간은 전을 다 부치고 설거지를 했을 시간인데…'하면서 누리고 즐기고 있는 시간이 흐르는 게 너무 아까웠다.

가을휴가의 둘째 날이자 추석날 아침에 가족 카톡방에 사진 한 장이 올라왔다. 큰아주버님께서 비록 차례상은 경기도 하남에서 준비되어 있지만 대전, 상주에 있는 가족들이 함께 묵념을 해달라고 하시며 다 차려진 차례상 사진을 보내셨다. 시아버님께서 먼저 각자 안전하게 추석을 보내자고 하셨지만 큰아주버님은 차례상 없이 추석을 보내는 것이 내내 마음에 걸리셨던 모양이다. 뜻은 충분히 이해가 되나 같은 며느리 입장으로 고생하셨을 형님이 먼저 생각났다. 나는 묵념을 해달라고 하셨던 말도 잊고 나는 카톡에 올라온 차례상 사진을 크게 확대하면서 혼잣말을 했다. '아, 이 정도면 반나절은 꼼짝하지 않고 전 부치셨겠네. 맏며느리는 이래서 힘들다고 하는 건가?' 가을휴가를 만끽하고 있는 막내 며느리인 나는 눈치가 슬슬 보였다. 그렇지만 귀한 가을휴가를 마음 불편하게 보낼 수 없기에 형님께 고생하셨다는 인사말과 함께 뻔뻔하게도 미안한 마음을 떨쳐냈다.

가을휴가의 마지막 셋째 날이 금새 와버렸다. 여느 때라면 명절 다음날은 친정을 방문하는 날인데 남편 눈치가 보였다. 사실 친정은 자동차로 20분 거리에 있고 명절이 아니더라도 수시로 방문할 수 있는 곳이다. 그런데 안전하게 명절 보낸답시고 시댁은 안 갔는데 친정에 가자고 남편한테 말하기가 왠지 미안했다. 그래서 이번 연휴에는 친정집도 찾지 않겠다고 생각하고 늦은 아침을 준비하고 있는데 남편은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 애들을 챙기면서 친정 집에 가자고 먼저 서둘렀다. 벌써 장모님과 아침을 같이 먹기로 했다며 아침식사 준비하지 말라고 하는 남편을 따라 못 이기는척하며 나도 나섰고 나의 가을휴가 마지막 3일차에는 추석 명절을 실감하며 엄마가 해주신 맛있는 음식들로 푸짐하게 하루를 보냈다. 행복한 가을휴가의 마무리였다.

엉겁결에 내게 주어진 막내 며느리의 가을휴가는 순식간에 지나갔다. 하지만 이 시간 덕분에 가을이 우리 곁에 가까이 깊이 무르익었음을 몸으로 느끼고 즐길 수 있었던 충분한 시간이었다. 시작은 그저 코로나로부터 안전한 명절 보내기였지만 이 시간을 통해 심신은 더욱 편안해졌고 긍정적인 에너지로 가득 찼다. 이런 충만한 행복감은 누구 덕분일까? 코로나 방역대책 덕분이라고 해야 할까? 센스 넘치는 시아버님 덕분이라고 해야 할까? 이민정 건양대병원 간호부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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