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경 대전을지대학교병원 비뇨의학과 교수
김대경 대전을지대학교병원 비뇨의학과 교수
사과를 깎을 때 오른손잡이의 경우 칼을 오른손에 쥐고 시계 반대방향으로 깎아 나가게 된다. 이때 왼손으로 사과를 잡는데, 왼손의 움직임이 칼을 든 오른손 못지않게 중요하다. 사과를 지지하는 역할과 칼의 움직임에 맞추어 조금씩 돌려주는 동작의 균형을 잡아 리듬감 있게 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말로 하면 좀 복잡한 듯 들리지만 실제로 몇 번 깎다 보면 이런저런 신경 쓰지 않고도 잘 된다. 마치 초보 때 그렇게 힘들던 운전이 어느새 능숙해 지고 여유가 생기듯이 과일 깎는 것도 금방 익숙해진다. 특히 주먹 정도 크기의 둥그런 사과는 쉽사리 이어 깎기가 가능하다.

한 손에 들기 버거울 정도로 큼지막하고 표면이 울퉁불퉁한 배를 깎기 위해서는 조금 더 섬세한 손동작이 필요하다. 사과 깎는 데 어느 정도 자신이 있는 필자도 커다란 배의 경우 비상한 노력과 정성이 들어가야 이어 깎기가 가능하다. 그런 만큼 모든 껍질이 이어진 상태로 잘 깎은 후에는 `해냈다!`는 작은 성취감에 잠시 행복해지곤 한다.

그날도 그랬다. 갑자기 과일 생각이 나서 냉장고를 살펴보니 배와 복숭아가 있었다. 하나씩을 꺼내어 배부터 깎기 시작했다. 꽤 커다란 크기였기에 힘이 좀 들긴 했지만 그런대로 무리 없이 깎아 나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깎여진 껍질이 끊어지지 않고 자연스럽게 잘 이어지자 절반가량 넘어가면서부터는 좀 욕심이 생겼다. 이후 조심조심하며 정성을 다했고, 결국은 껍질 전체를 한 줄로 잇는데 성공했다. `역시 난 과일을 잘 깎는 단 말이야` 흐뭇한 생각에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성공적인 배 껍질 이어 깎기를 끝내고 옆에 놓인 복숭아를 깎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것이다. 복숭아 껍질을 가능한 얇게 해가며 깎으려 했지만 칼은 자꾸만 부드러운 껍질을 파고들어 속살을 향했다. 깎여진 껍질 안쪽에 붙은 맛난 속살이 아까웠다. `아, 얇게 깎아야 하는데…` 얇게 깎으려 껍질 쪽 가까이 칼날을 바싹 붙이면 어느새 껍질이 끊어지곤 했다.

그러면서 한 절반쯤 깎았을까, 문득 껍질 깎인면을 슬쩍 밀어보니 이게 웬일인가. 껍질이 부드럽게 밀리며 얇게 벗겨지는 게 아닌가. 그렇다, 복숭아 껍질은 깎는 것이 아니라 벗겨야 되는 것이었다!

껍질 깎기에 대한 자신감과 자부심에 도취되어 과일 마다 껍질을 제거하는 방법이 달라야 한다는 것을 깜빡 잊은 것이다. 복숭아가 사과나 배와 같이 둥근 형태라 그랬을까? 아마도 바나나였으면 당연히 벗겨 먹었을 것이다.

물론 복숭아 껍질을 깎아도 된다. 다만 쉽게 할 수 있는 방법을 두고 굳이 어렵게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아무리 잘 깎아도 벗기는 것에 비해서 먹을 수 있는 속살의 양이 적어질 테니 말이다.

사람들은 세상을 살면서 자신만의 성공 방정식을 가지게 된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과거에 갖가지 어려운 고비를 넘기는데 적용되어 성공한 경영 방식이 있다. 하지만 개인과 기업 모두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방식이, 과거에 그렇게도 잘 적용되어 정답으로 안내하던 그 성공방정식이 모든 수식에 다 적용될 수 있는 만능 방정식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변해야 산다`는 1995년, 포스코경영연구원에서 펴낸 책 타이틀이다. 기업 경영자들에게, 급속도로 변해가는 환경 변화 앞에서 살아남으려면 유연하고 탄력적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일러주는 내용이다. 이미 21세기가 시작하고도 20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다. 시대가 변했다. 주변 환경도 변했다.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가치관이 변했다. 지난 해 출판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90년생이 온다`는 기성세대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신세대의 `다른` 가치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다르다는 것이 틀리다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세상에는 많은 과일이 있다. 제대로 먹기 위해서는, 깎고 벗기고, 때로는 깨는 과정이 필요함을 이해해야 한다. 김대경 대전을지대학교병원 비뇨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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