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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덕포럼] 과학기술계의 시월지탄(十月之嘆)

2020-10-20기사 편집 2020-10-20 07:2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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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사진1정정훈 한국기계연구원 책임연구원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 추억과 욕망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우는 사월이 시인 엘리엇에게는 잔인한 달이었다면, 노벨상 수상자를 발표하고 국회의 정기 국정감사가 열리는 매년 시월은 과학기술계에는 잔인한 달이 아닐까? 막대한 국가 연구개발 예산(내년에는 27조 원 돌파 예상)이 투입되기 때문에 그에 상응하는 성과가 나와야 한다는 경제적 논리에 따른 노벨상 수상에 대한 기대감이 주는 압박감, 중차대한 국가 과학기술 이슈들은 실종되고 일반인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문제들에 대해 반말과 고성이 섞인 당리당략적 정쟁의 장이 일상화된 국정감사의 모습에 한편으론 송구하고 다른 한편으론 서글픈 탄식이 나오는 그런 시월이다.

해마다 증가해온 국가 연구개발 예산 덕분에 선진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짧은 연구개발 역사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과학기술은 비약적으로 발전해 왔지만, 노벨상 수상과 같은 탁월한 성과를 내기 위해 반드시 전제돼야 하는 '자율적 연구개발 환경 조성'의 관점에서는 아직도 미흡한 실정이다.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International Institute for Management Development)이 올해 6월에 발간한 세계 경쟁력 연감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본 연감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과학·기술 인프라 순위는 각각 3위와 13위이지만, 과학연구와 기술개발 지원을 위한 법적 환경 순위는 각각 31위와 44위로 매우 낮은 수준이다. 이는 과학기술에 대한 국가적 철학과 원칙이 여전히 확립되지 못했음을 방증한다고 생각된다.

영국의 홀데인 원칙(순수과학이든 응용기술 분야이건 정부는 이를 통제하려는 시도를 해서는 안 됨)과 독일의 하르나크 원칙(연구 수행에 관련된 모든 권한을 연구자가 가지며, 정부는 예산을 지원하지만 간섭하지 않음)과 같은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연구개발 환경을 보장하는 원칙이 왜 우리나라에서는 금과옥조로 자리 잡지 못하고 있을까?

한편, 정보통신 분야의 전문가인 강명구가 저서 '아무도 알려주지 않은 4차 산업혁명 이야기'에서 역설했듯이, 현재 진행 중인 제4차 산업혁명은 단순한 기술혁명이 아니라 제1차, 제2차, 제3차 산업혁명이 공통적으로 추구해온 대량 생산·소비에 의한 획일화, 권력의 중앙 집중과 폐쇄적 독점을 통한 '효율성의 극대화'라는 패러다임의 반작용이며, 맞춤, 분권·개방과 공유를 통한 '자율성의 극대화'를 지향하고 있다. 따라서 '자율'에 대한 철학과 원칙이 전제되지 않고 제4차 산업혁명을 주도하는 기술만을 추구한다면 이의 실효성에 상당한 제한이 있으리라 예상된다.

이러한 철학과 원칙을 공고히 확립하기 위해서는 반대 측에 있는 집단을 지속적으로 설득하거나 때로는 치열한 투쟁을 불사할 수 있는 과학기술계의 강력한 '연대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하지만 작금의 우리나라 과학기술계의 모습은 어떠한가? 이와 관련해 과학기술계 출신 신용현 전 국회의원은 최근 개최된 토론회에서 '공무원들은 자기들도 철밥통이지만 정부 출연연구기관을 자기들보다 더한 철밥통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과학기술계가 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자기중심적 일 처리와 주로 개인의 관점에서 의견을 표출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매우 아픈 지적이다. 우리 과학기술계는 실제로 협력과 상생보다는 전시성 성과와 논문 편수, 특허 건수, 기술료 수입 등의 정량적 실적에 기반을 둔 각종 평가에 연연하며 각자도생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에 대한 엄격한 자기 성찰이 요구된다.

정부는 과학기술에 대한 확고한 철학과 원칙을 가지고 연구현장에 '자율의 꽃'이 만개할 수 있는 정책과 제도를 추진하고, 과학기술계는 이런 연구 환경에서 철저한 책임과 윤리 의식을 바탕으로 고유의 전문지식을 활용해 탁월한 성과로 화답함으로써, 시월이 더는 탄식이 절로 나오는 잔인한 달이 아니라 노벨상 수상과 같은 풍요로운 결실의 달이 되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정정훈 한국기계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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