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동현 우송대 엔디컷칼리지 석좌교수
손동현 우송대 엔디컷칼리지 석좌교수
기회는 평등하게 과정은 공정하게, 그리고 결과는 정의롭게! 이 얼마나 가슴 벅찬 말인가! 이 이상이 실현되려면 제일 먼저 요구되는 것이 아마도 합리적 정신, 합리적 규범 의식일 것이다, 임의의 주관적 편견이나 인습에 갇힌 비리를 바로잡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법과 제도에 깃든 합리성일 것이다. 이것이 담보돼야만 우리가 감정의 굴레에서 벗어나 공정해질 수 있고 이를 기초로 사회정의를 세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감정이나 의지는 돌보지 않은 채 합리적 정신만으로 바람직한 사회생활을 영위해나갈 수 있을까? 사정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러기에 사회정의의 문제는 간단치가 않으며, 우리의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감정이나 의지는 그 자체가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다. 사실 감정도 의지도 없다면 우리의 공동체 삶 자체가 불가능해질지도 모른다. 오늘 우리가 주변에서 보는 많은 부도덕한 일들은 오히려 감정도 없이 합리적으로 순익이나 따지는 메말라진 인심 때문 아닌가. 그러니 문제는 이 정의(情意)적인 측면을 바람직한 공동체 생활을 위해 어떻게 잘 살리느냐 하는 데 있다. `사람이 먼저`라는 문대통령의 슬로건이 혹 이를 말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특히 우리 한국인의 전통적인 도덕관념 속에는 온정이나 의리가 훌륭한 도덕적 품성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로 뿌리 깊이 자리 잡고 있다. 사실 온정을 베풀고 의리를 지키는 것은 도덕적으로 높이 평가되어 마땅한 일 아닌가.

그러나 냉정히 생각해 보면 여기에는 하나의 전제조건이 있다. 온정을 베풀고 의리를 지키는 일이 공익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온정을 베푼다고 범법행위를 눈감아 준다든지, 의리를 지킨다고 부정행위를 은폐해 준다면, 이때의 이런 온정과 의리는 결코 정의로울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냉철한 사고에 기초해 합리적인 규범의식을 갖는 일과 감정이나 의지에 따라 온정을 베풀고 의리를 지키는 일은 각기 때와 장소에 맞게 분별돼 선택돼야 할 일이지 어느 하나만이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를 분별해 선택할 기준은 무엇일까? 필자는 다음 두 가지를 생각해 본다:

첫째는 지금 처해 있는 상황이 공적인 것인지 사적인 것인지 냉정히 판단해, 공공적 연관 속에서라면, 우리는 오직 합리적 규범의식만을 따라야 하고 사적인 인간관계 속에서라면, 가능한 한 온정과 의리를 존중하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다.

둘째는 지금 문제되고 있는 행위가 자신의 권익을 추구하는 성격의 것인지 자신의 의무를 수행하는 성격의 것인지를 숙고해, 전자의 경우라면 합리적인 규범이 허용하는 것 이상을 요구하지 말 것이며, 다른 사람을 향해 자신의 도덕적 의무를 행하는 경우라면 가능한 한 온정과 의리를 다하여 행동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공사를 구별하지 않고 자기 편이라면 기를 쓰고 의리를 지켜 집단이익을 도모하려는 사람들, 내 혈족에 관한 일이라면 공사를 막론하고 집요하게 아량과 온정을 요구하는 사람들, 공인이면서도 본인의 일이라면 끝없이 인권을 주장하는 사람, 상대를 공격할 땐 사적인 영역까지 파고 들어 흠을 내려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고위 직에 앉아 "정의를 지킨답시고" 권한을 행사하는 걸 보고 있노라면, 차라리 정의사회의 꿈을 미리 포기하는 것이 정신건강에 나을지 모르겠다. 손동현 우송대 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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