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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칼럼] 탓과 책임의식

2020-10-08 기사
편집 2020-10-08 07: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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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사진1이창덕 신부·천주교 대전교구 원로사목자
가톨릭교회의 기도문에 '고백의 기도'가 있다.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잘못한 것들과 의무를 소홀히 한 것들이 자기 탓이라고 고백하며, 탓이라는 말이 나올 때 가슴을 주먹으로 치는 기도다. 내면세계의 문을 열어젖히고, 삶에서 물든 죄책들을 선으로 이끌지 못한 자신을 참회하며, 절대 선 자체이신 신에게 귀의하겠다는 의미로 가슴을 치는 것이다. 그때 내심의 양심이 되살아나 세상의 잘못들에 대한 자신의 책임 의식을 가슴에 새기는 것이다.

근래에는 책임을 회피하고, 탓을 남에게 돌리는 탓의 보편화가 정치를 비롯해 각계각층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터키의 작가 아지즈 네신(Aziz Nesin)의 '장관과 고양이'라는 풍자소설을 보면 '아침부터 어떤 장관이 기분이 언짢아서 출근하자마자 차관을 불러 짜증을 냈다. 꾸중을 듣고 화가 난 차관은 탓을 국장에게 화풀이했고, 국장은 과장, 과장은 계장, 계장은 계원을 불러 꾸짖었다. 계원의 탓 풀이는 퇴근길에 수위에게 이르렀고, 수위는 직장에서 화를 풀 곳이 없자 집으로 돌아가 마누라에게 그 화를 쏟아 놓았다. 그 아내의 화는 죄 없는 고양이에게 퍼부어져서 결국 고양이는 집에서 쫓겨 길에서 방황하게 됐다'는 얘기다.

탓을 남에게 돌리는 것은 자신의 허물을 정당화시키기고 상대에게 탓을 돌려 모면하자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사람의 소이연(所以然)인 양심이 없음으로 인간의 존엄성에 먹칠하는 사람이다. '자기 집 두레박줄이 짧은 것은 탓하지 않고, 남의 집 우물이 깊은 것만 탓'하는 이런 이들에게는 책임지는 자리를 맡겨서는 안 된다.

'육책우천리(六責雨千里)'라는 옛 성어가 있다. 중국 고대 은나라의 성 탕왕이 7년에 걸친 큰 가뭄을 당해 상림에서 기도하기를 "정치하면서 절약하지 않았는가. 백성이 직업을 잃지 않았는가. 궁실은 엄숙한가. 여자의 청이 너무 많지 않았나. 뇌물이 행해지는 것은 아닌가. 참소하는 이가 많지 않은가"를 들어 자신의 과오로 삼았다는 것이다. 왕은 자신의 죄를 고하고 근신함으로 결국 비가 전국을 적셨다는 이야기다. 그 후 동양의 제왕들은 나라의 큰 변고가 있을 때 그것은 곧 하늘의 진노로 생각하고 자신의 부덕을 자책하곤 했다.

요즈음 우리 정치 현실을 보면 책임의식 대신에 탓을 남에게 돌리는 추한 모습을 자주 본다. 청문회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유행어를 만들었고, 나라가 한순간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졌는데도 책임이 다른 곳에 있다고 하며 탓을 돌리고 있다. 이를 'BJR(배째라)족'이라는 신생어가 우리의 탓을 전가하는 문화를 꼬집고 있다. '노블리스 오블리제'(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의 자세를 가슴에 품고 정치로 뛰어들었을 터인데 말이다.

미국 링컨 대통령이 남북전쟁 중 가장 치열했던 '게티즈버그 전투' 때 마이드 장군에게 공격 명령을 내리면서 짧은 편지 한 통을 보냈다. "이 공격작전이 성공한다면 그것은 모두 당신의 공로입니다. 그러나 이 작전이 실패한다면 그 책임은 전적으로 내게 있으니 이 모든 실패의 원인이 링컨 대통령의 명령이었다고 말하고 이 편지를 모두에게 공개하십시오!"라고 적혀져 있었다. 이러한 지도자가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하며, 국민들은 법을 간과하고 의무를 소홀히 했을 때 내 탓이라고 안으로 반성하는 마음이 요청된다.

회사의 직원은 능력보다 책임감이 우선이라고 말한다. 책임감 없는 사람은 목적과 목표 의식이 없는 사람이며, 문제가 발생하면 피하려고 잔머리를 굴리거나 다른 사람 탓을 할 뿐이다.

헬렌 켈러(Helen Keller)는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 쪽 문이 열린다"고 했다. 탓을 돌리는 이는 닫힌 문만 바라본다. 탓을 자신에게 돌리고 책임을 져보라. 열린 문이 보이게 될 것이다. 이창덕 천주교 대전교구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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