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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가산책] 언택트 시대 살아남기

2020-09-29기사 편집 2020-09-29 07: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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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사진1최수웅 교수

서늘한 영화가 있다. 잔혹한 설정도 없고, 유혈이 낭자한 것도 아닌데, 보고 있자면 오스스 소름이 돋는 영화. 고레에다 히로카츠 감독의 <아무도 모른다>가 그렇다.

설정부터 가차 없다. 엄마가 떠난다. 아빠가 다른 네 남매를 남겨놓고. 아이들은 학교에 다니지 못한다. 아르바이트도 할 수 없다. 그저 방치되었다. 사회는 간단히 이들을 잊는다. 아이들은 엄연히 살아있으나, 누구도 아이들이 거기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영화의 제목처럼. 관객만 알고 있다. 이들에겐 오직 파국이 예정되었다는 것을. 관객은 이 사실을 아는데, 아이들만 모른다.

이 작품이 더 스산한 까닭은 실화를 바탕으로 했기 때문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츠 감독은 다큐멘터리로 경력을 쌓았다. 그래서 캐릭터와의 감정 이입을 의도적으로 피한다. 지극히 냉정하게 거리를 유지하면서 다가가지도, 회피하지도 않는다. 그렇기에 관객은 불편하다. 하지만 감독은 손쉬운 회피를 용납하지 않는다. 다만 요구한다.

피가 흐르지 않는 지옥도. 이 엄혹한 현실을 지켜보라.

영화 속 설정은 우리 사회와 닮았다. 아이들이 다쳤다. 덩그러니 집에 남겨진 채로. 허기를 채우려다 화마에 휩쓸렸다. 홀로 형제를 키우던 엄마는 집을 비웠다. 비대면 상황 속에서 이들은 방치되었다. 아무도 몰랐다. 불길이 치솟을 때, 형은 동생을 먼저 대피시켰다. 아이들은 고작 열 살, 그리고 여덟 살이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곳이 정녕, 지옥이 아닌가.

너무나 쉽게 언택트(Untact) 사회로의 전환을 이야기한다. 세상이 변했으니 새로운 기술을 익히라고 호들갑 떤다. 하지만 명백한 착각이다. 드러나지 않는 이들의 헌신 없이는, 언택트 사회는 지탱되지 못한다. 우리 삶이 누군가의 보살핌 없이는 유지되지 않듯이. 방역 현장의 수고야 말할 것 없다. 택배기사들의 과로사가 이어진다. 교육 현장의 버거움은 한도를 넘었다. 보살핌을 당연하게 여기지 말아야 하고, 헌신을 희생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이를 모르면 파괴적 삶의 양태가 반복될 뿐이다. 코로나19 이전에 그러했듯이. 그동안 우리는 무한경쟁의 수레바퀴를 굴렸다. 어깨까지 진흙탕에 잠긴 줄 모르고. 아니, 모른 척하고. 오직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그나마 우리 사회가 유지되었던 건, 결코 시스템 때문이 아니다. 그 빈틈을 채웠던, 사회 구성원들의 선의(善意) 덕분이었다.

시스템만 보면 한국 사회는 이미 지옥이다. '헬조선'이란 말을 철없는 아이들의 자기비하로 치부하기는 어렵다. 코로나19로 인해 강제 휴식이 주어지면서 수레바퀴는 다소 속도가 줄었다. 지금이야말로 돌아볼 때다. 방향을 다시 잡고, 속도를 조정하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희생하는 이들을 살펴야 한다. 버려지는 아이들이 없도록 돌봐야 한다. 진흙이 목까지 차오른 뒤에는 구명줄을 움켜쥘 수도 없다.

불교의 영향을 받은 한민족 저승관에서 지장보살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단 하나의 목숨이라도 지옥에서 구하기 위해 거미줄을 내린다. 신화원형을 처음 공부했을 때는 이해하지 못했다. 기왕이면 그물이라도 던져 더 많은 사람을 구해야 하지 않는가.

지옥의 세월을 좀 더 견뎌낸 지금 새삼 깨닫는다. 한 생명 한 생명 정성을 다하지 않고는 구원할 수 없다. 언택트 사회는 기술로만 지탱되지 않는다. 끝내 포기하지 않고 거미줄 같은 희망까지 지켜내는 지장보살의 마음을 품은 사람만 이 시대를 지킨다.

최수웅 단국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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