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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광장] 부도덕한 인지부조화

2020-09-15기사 편집 2020-09-15 07: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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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사진1손동현 우송대 엔디컷칼리지 석좌교수
서울 사람과 충청도 사람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며 지어낸 '개그' 중에 이런 게 있다. 어느 여름날 서울 아가씨 둘이 대전에 놀러 왔다. 길가에서 수박을 파는 행상 아주머니와 마주쳤다. "아줌마, 이 수박 한 통 얼마예요?" "월매면 사겄슈?" "글쎄요, 한 2만 원 하나요?" "뭐요? 누굴 도둑으로 아나?" "그럼, 5000원만 내면 돼요?" "뭐요? 에이, 갖다 돼지나 먹여야 겠네!"

이 충청도 아주머니는 너무나 도덕적이다. 과일값 흥정하는 어찌 보면 단순한 일에서도 그는 사람 마음의 도덕적 태도를 읽어 내려고만 한다. '나는 수박 파는 하찮은 장사지만, 돈만 알고 바가지나 씌우는 나쁜 사람은 아니다! 그렇게 값을 후려치는 너희들은 나쁜 사람들이다!'라고….

그렇다. 인간사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항상 사람들 사이에서 생기는 의견의 불일치에 있지만, 정말 우리를 괴롭히고 화나게 하는 것은 특히 그 의견의 불일치가 도덕적인 문제에서 생겨날 때다. 서로 도덕적 선의를 확인하게 되면 좀 싸게 팔아도, 좀 비싸게 사도 그리 속상하지 않다. 표창장을 가짜로 만들었거나 휴가에서 귀대가 좀 늦어졌다 해도, 그게 다 불가피한 일로 도덕적 선의가 밑바탕에 깔려있는 일들이라면 사람들이 그렇게 화를 내며 괘씸하게 생각하지는 않을 거다. 수박 값 깎는 사소한 일이라도 그게 도덕적 악의에서 나왔다고 생각하는 순간 화가 치미는 거다. "나쁜 놈!"이라고 생각되면, 사소한 일이라도 용서하기 어려운 거다. 그 똑똑한 닉슨이 거짓말 한 번 한 거 가지고 대통령직에서 물러나야 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그런데 의견의 불일치에도 그 내막을 면밀히 살펴보면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Ch. Stevenson 1963). 하나는 믿음에서의 불일치이고 다른 하나는 태도에서의 불일치다. 믿음, 곧 앎에서의 불일치란 인지적인 차원에서 '알고 있는 내용'이 서로 다른 데서 오는 의견불일치이고, 태도에서의 불일치란 합리적으로는 쉽게 설명하기 어려운, 마음 속에 도사리고 있는 그 어떤 정서적 감정적인 것으로 인한 의견불일치를 가리키는 것이다. 전자는 정보만 공유하면 같은 지식을 갖게 되어 해소할 수 있는 것이지만, 후자는 그렇게 해서 알고 있는 내용이 같아졌다 해도 그와는 별도로 여전히 남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이른바 '보편이성'에 힘입어 우리는 입장과 처지가 다르더라도 이견을 좁혀 합의에 이를 수 있다고 믿어서는 곤란하겠다. 문제는 합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감정과 의지에 있다니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도덕심리학적인 관점에서 소위 '인지 부조화 이론'(L. Festinger 1957)이란 것을 생각하게 된다. 사람들은 자신의 태도와 행동이 일치하지 않을 때, 이 불일치를 부담스럽게 느껴, 태도에 맞게 행동에 변화를 주는 게 보통인데, 거꾸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자신의 태도, 즉 생각과 감정을 변화시키기도 한다는 것이다. 전에 했던 말과는 다른 행동을 해놓고서 이제 와서는 그 행동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말을 바꾸는 현상도 있다는 것이다. 야당일 때 소리 높여 주장했던 것을 여당이 되어서는 정반대로 뒤집어 말하는 사람들을 국회에서 많이 본다. 인지부조화 이론에 비춰보면 그 뻔뻔스러움이 어디서 오는지 설명이 된다. 그러나 인간에게 이런 심리가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 해서 이런 '말바꿈'이 도덕적으로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부도덕하면 일단 인간이 아니다. 도덕적 동물이기에 인간은 동물이 아닌 거다. 장구한 진화의 과정에서 인간이 최강의 종이 된 것은 인간이 서로 협력할 줄 알게 된 데 그 핵심 열쇠가 있는 거고 그 협력의 핵심 열쇠는 도덕성의 공유에 있는 거다. 평생 가야 한 번도 만날 일 없는 낯 모르는 익명의 다수와 협력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도덕성을 토대로 누구나가 믿고 따를 수 있는 행동의 지침을 공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감정과 정서를 공유할 수 있는 지혜를 어디 가서 구해와야 할지 모두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일이다. 손동현 우송대 엔디컷칼리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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