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 블라디미르 마카닌 지음/ 안지영 옮김/ 문학과지성사/ 654쪽/ 2만 1000원

러시아 현대사의 `뜨거운 감자`라 할 수 있는 체첸전을 배경으로 그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 시대의 인간에 관한 이야기를 담았다. 사회주의가 무너지고 자본주의가 급격한 속도로 세워지던 러시아의 혼란스러운 현실의 파도에 몸을 실은 한 개인의 내면을 성실하고 치밀하게 그려냄으로써 저자는 우리 시대 비극의 주인공을 탄생시켰다.

혹독한 현실에서도 일말의 선량함과 나름의 도덕적 지향을 지닌 `우리 시대의 작은 영웅`이라 할 수 있는 주인공 `질린 소령`의 모습에서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초상을 목격하게 된다.

전투병이 아니라 창고와 주택 건설을 위한 공병으로 파병된 질린은 모든 책임을 전가하고 떠난 상급자들로 인해 홀로 창고에 남겨진다. 체첸 반군들과 하루하루 싸우며 창고의 무기와 휘발유를 지키던 그는 체첸 반군의 수장 두다예프와의 우연한 만남을 계기로 한칼라 지역 일대의 휘발유 왕으로 거듭난다. 게릴라전으로 위험한 체첸의 길을 따라 러시아 부대와 러시아 측 체첸군 부대에 휘발유를 배송하고 그 대가로 배송한 휘발유의 10분의 1을 챙기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번 돈을 부지런히 아내에게 송금해 러시아의 큰 강 주변에 이층집을 짓는다. 한밤중에 휘발유 창고들 사이에 자리한 작은 뜰에서 아내와 통화를 할 때 행복을 느끼는 평범한 가장인 동시에 수없이 죽을 고비를 넘기며 이 무의미한 전쟁의 문법을 온몸으로 체득하는 질린 소령은 그 속에서 전쟁의 신 `아산`으로 살아가기도 한다.

책의 제목이기도 한 `아산`은 작품 속에 등장하는 바자노프 장군의 말에 따르면 한때 체첸 지역을 휩쓸었던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대항마로 산 사람들이 만들어낸 피를 탐하는 전쟁의 신이다. 고대의 아산은 피를 원했지만, 현재의 아산은 돈을 원한다.

전쟁 통에서 돈벌이를 하고 있지만, 주인공을 움직이는 건 결국 멋모르고 전쟁터로 끌려 나와 죽거나 체첸 반군의 포로가 되어 끔찍한 일을 겪는 수많은 러시아 `애송이`에 대한 연민이다. 그의 내면에 모순적으로 공존하는 냉혹함과 관용, 두려움과 용기, 냉소와 연민, 선량함과 강퍅함, 부당함과 정의로움 등은 독자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 자신의 작은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고향에 두고 온 처자식을 걱정하고, 그들에게 더 나은 삶을 선물하고 싶어 하고, 또 그런 자신을 부끄러워하고, 애송이들 때문에 날린 돈을 아까워하면서도 동시에 보호받지 못하고 죽어갈 어린 청년들을 안타까워하는 주인공의 모습은 우리의 모습과 그리 다르지 않다.

저자는 등장인물들의 축재와 부정에 면죄부를 주지도, 그것을 고발하지도 않는다. 질린 소령이 지키려 애쓰는 최소한의 도덕적 선을 찬양하지도 않는다. 전쟁의 신 아산조차 피보다 돈을 구하는 이 새로운 시대에 자신을 지키고, 가정을 지키고, 작은 양심을 지키고자 하는 소박한 인간의 내면 풍경을 꼼꼼히 그릴 뿐이다. 질린에게 이 전쟁은 목숨을 걸어야 할 만한 그 어떠한 이유도 없다. 그가 발견한 이 전쟁의 유일한 논리는 `승자가 정해지기 전까지 전쟁은 부조리하다`는 것이다. 그런 그가 자기 부대를 잃고 떠돌이 병사가 된 어린 청년들을 구하고 그 과정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다. 어찌 보면 가장 평범한 소시민인 그는 소비에트 전쟁문학에서 넘쳐나는 `거대한 영웅`은 아니지만, 개인의 양심을 끝까지 따라가고자 했던 `우리 시대의 작은 영웅`이라 할 수 있다.김동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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