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벤 길마 (하벤 길마 지음/ 윤희기 옮김/ 알파미디어/ 448쪽/ 1만 6000원)

하벤 길마
하벤 길마
"눈으로 볼 수 있고 귀로 들을 수 있는 사람들을 위한 세상에, 항상 모르고 지나치는 게 많은 그런 세상에, 과연 내가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시각장애와 청각장애를 가진 미국의 흑인 여성 하벤 길마는 하버드 로스쿨 최초의 중복장애인이다. 에리트레아계 에티오피아인 아버지와 에리트레아인 어머니 사이의 큰딸로 태어난 하벤 길마는 두 눈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좌절하지 않았다.

과거 난민으로 떠돌던 부모님의 이야기에 자극을 받은 그녀는 자신이 고립된 존재가 아니라 세상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세계 곳곳을 누볐다.

그 여정 속에서 아프리카 말리에 학교를 짓는 일에 참여하고 알래스카 빙산에 올라 자신의 한계를 초월했다. 하버드 로스쿨 재학 중 문자를 점자로 변환하는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을 개발해 자신과 같은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준 이야기도 담겨 있다.

하버드 측에서도 중복장애인인 하벤을 위해 전폭적인 지원을 보냈다. 그녀를 위해 수화 통역사를 고용해 수업 참여에 도움을 줬으며 동료 학생들도 수업이 끝나면 자신들이 적은 수업 내용을 하벤에게 전달했다. 이런 도움으로 하벤은 여러 차례 우등 장학생으로 뽑혔으며 법학 분야에서 가장 유명한 스캐든 펠로우십에 선발돼 재정 지원을 받기도 했다.

그녀는 졸업 후 장애인 인권을 위한 소송에 참여했다. 하벤은 전자책, 오디오북 등을 제공하는 디지털 도서관 업체 스크리브드(Scribd)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해당 업체가 화면의 시각 정보를 음성이나 디지털 점자로 전환하는 프로그램인 스크린리더를 차단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문제 인식부터 재판에서 승소한 과정을 상세하게 기록해 시각장애인 권리를 향상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하벤은 장애를 혁신으로 나아갈 기회라고 생각한다. 그녀의 이야기는 역경을 뛰어넘는 감동적인 성공담에서 한 발 더 나가, 매일 반복되는 우리의 일상에서 자극을 주는 계기를 제공한다. 그녀의 성공에 뒷받침 역할을 해온 사회제도 지켜봐야 할 대목이다.

그녀의 책은 다른 회고록과 달리 과거를 회고하는 글이 아니라 지금 일어나는 일을 말하듯 현재형으로 전개한다. 저자는 지난 일을 되돌아볼 때 많은 사람에게는 과거의 일이 선명한 기억으로 남겠지만 자신에게는 늘 새롭게 겪어야 하는 낯선 경험으로 느껴진다고 묘사한다. 이에 이 책에 수록된 총 24개의 에피소드가 책을 읽는 독자가 과거의 일을 듣는 느낌이 아니라 현재 일어난 사실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돼 그 내용이 생생하게 전달된다. 박상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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