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미라 시인
박미라 시인
몇 번을 생각해도 팬데믹 사안에 대해 쓰고 싶지 않다. 그렇지만 이 끔찍한 상황을 외면할 수도 없으니 똑바로 바라보는 쪽을 선택해 본다. 세상 어떤 불가능도 가능하게 만드는 현대인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질병으로 세상이 용광로처럼 들끓고 있다. 필자와 같은 소시민은 사태 해결을 위해 어떤 도움도 되지 못한 채 예방 수칙을 잘 따르는 것을 지상 최대의 과제로 알고 행동할 뿐이다.

이처럼 참담한 상황에서 문학을 논하자는 것을 혹자는 부질없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불이 났다고 다 같이 달아날 수는 없지 않은가? 내가 한 바가지의 물을 뿌려서 불을 끄겠다는 것이 아니고 이러한 마음들이 여럿의 한 바가지로 이어지기를 바라자는 것이다. 눈앞에 닥친 어려움 앞에서 도망치지 않고 제자리를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큰 용기와 노력을 필요로 하는지 우리는 잘 안다. 그러나 문학은 그렇게 해야 한다. 눈에 보이는 현상만이 아닌 현상 그 안쪽의 참모습을 보고 자신이 본 진실을 말할 수 있는 것이 문학이기 때문이다.

필자가 함께하는 문학단체에서는 코로나19를 주제로 한 전자시집을 발간했다.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백승(百戰百勝)이라는 옛말을 믿자는 것이다. 정부의 정책을 철저히 따르고 의료진의 지시를 잘 지키는 것은 물론이며 도대체 저 흉악한 질병이 무엇인지, 어떤 속성을 가지고 있는지 자세히 알자는 것이다. 내가 알고 덤비는 것과 타인의 지시로 덤비는 경우와의 차이는 참으로 지대할 것이다. 우리는 시를 쓰기 위해 코로나19라는 질병에 대해 이리 보고 저리 뜯고 대처법에 대해 곰곰 생각했다. 마음의 자세 또한 굳건히 다잡았다. 우리가 먼저, 우리라도 먼저, 눈 크게 뜨고 싸움에 나서자고 일어선 것이다. 우리는 이 싸움에서 반드시 이겨야 한다. 다만 그 시기가 언제인가가 문제이다. 그 시기를 하루라도, 한 시간이라도 앞당기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실행해야 한다. 우리는 이기기 위해서 서로를 믿고 응원해야 한다. 문학은 문학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이 싸움의 일익을 담당하자는 것이다. 최근에 발간되는 문학잡지에는 팬데믹을 주제로 한 다수의 작품들이 발표되고 있다. 이 또한 공감을 통한 재난 극복의 고무적인 모습이라고 하겠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문학의 사명은 무엇인가? 대개의 경우 예술적 아름다움의 추구를 제일 앞에 둔다. 문학의 참된 의의는 삶이 추구하는 예술적 아름다움을 깊이 생각해 독자의 공감을 얻고 삶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문학은 독자와 함께 인생의 참모습이 어떠한지 의논하며 그것을 바탕으로 자신의 삶을 개선하고 현실을 변화시키는 실천적 삶의 방향을 제시하기도 한다. 이러한 관점으로 문학은 혼란한 시대일수록 세상의 등불이 돼야 한다. 불온문서처럼 세상을 떠도는 마스크가 어쩌면 우리를 구원할 최선의 수단일수도 있다고 앞장서야 한다. 비록 말문이 막히고 손발이 묶인 시절이지만 견디고 견뎌서 마침내 큰 목소리로 서로를 부를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해야 한다. 독자가 자신의 마음 앞에 희망이라고 적을 수 있도록 부추겨야 한다. 이 무서운 재앙 앞에 노출된 의료진들을 서슴없이 천사라고 불러야 한다. 그러나 천사도 밥을 먹고 잠을 자야 산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저 의료천사들이 감당하고 있는 재난극복의 고통을 내 것으로 알아야 한다.

앞서 밝혔듯이 문학은 없는 것을 있다고 우기는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있으나 알아보지 못하는 저 속의 것 들을 끄집어내어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엄청난 팬데믹을 견디고 싸워야 하는 모든 이들에게 어떤 것이 올바른 싸움인지 알려야 할 의무가 문학에게 있다. 혹, 문학의 자리에서 꺼내는 이야기나 부탁이 공감의 바깥으로 밀려난다면 그것은 스스로의 문학적 소양을 탓 할 일이 아니고, 지치고 힘든 이웃들의 하소연쯤으로 여겨도 좋을 것이다.

또한 우리는 이 질병이 어디서 왔는지 생각하면서 자연 앞에 겸손해 질 수 있기를 바란다. 박미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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