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수 국회의원·수필가
이명수 국회의원·수필가
`이순신 장군과 관노` 논란은 한 네티즌의 견해나 사과를 넘어 기본권과 인권의 시각에서 시대착오적인 우리 사회의 단면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심각성을 더한다. 필자는 정치인이기 이전에 아산 출신으로 어릴 적부터 이순신 장군을 존경하며 각종 학회와 연구에서 행적과 유지를 받들고 기리는데 노력해왔다. 우선 고 박원순 시장의 성추행 의혹을 옹호하는 글로 논란을 촉발한 진보 성향 온라인 커뮤니티의 `이순신 장군도 관노와 수차례 잠자리에 들었다`는 취지의 글에 대해 역사 기록상의 사실관계부터 바로 잡고자 한다.

관련 문구는 난중일기 탈초본(초서를 정서로 바꾼 책) 중, 1596년 9월 12일 여진, 9월 14일 여진입, 9월 15일 여진삽 등이다. 이 구절은 1935년에 일본 학자가 난중일기를 "이순신 장군과 여진이라는 관기가 관계를 했다"로 해석했다. 하지만 이후 노승석 교수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은 당시 조선의 호남지방에 이주해 살던 여진족과의 생활을 의미하는 `함께하다(共)`또는 단순히 `여진·여진입·여진삽`이라 해석하며 정설로 바로 잡았다.

1597년 4월 21일 "저녁에 여산의 관노의 집에서 잤다(夕宿于礪山官奴家)"는 문구도 있지만, 이순신 장군이 감옥에서 나온 후 모친상을 당하고 상중출사(喪中出仕)하여 백의종군으로 합천으로 가는 중 해가 저물어 여산(익산시 여산면 소재) 관아의 남자종집(官奴家)에서 하룻밤 유숙한 것으로, 당시 관노(官奴)는 남자종, 여자종은 비(婢)라 표기했다.

따라서 이순신 장군이 관노와 성관계를 했다는 표현은 전문가들의 견해에 근거할 때 엄연한 허위사실이다. 난중일기에는 `관노와 잠자리`라는 표현이 없으며, 또한 성관계를 표현하는 한문 표현은 `가까이 하다, 동침하다`는 `근(近)`, `포(抱)`, 또는 `동침(同枕)`, `동호(同好)` 등이 쓰였다. 난중일기에 표현된 `잘 숙(宿)`도 성관계를 의미하는 `동침`이 아니라 단순한 `숙박`을 의미한다. 무엇보다 이순신 장군과 동시대의 인물이자 가장 가까웠던 백사 이항복은 `고통제사이공유사(故統制使李公遺事)`에서 "이순신은 일찌기 여색을 가까이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실관계보다 더 중요한 심각성은 `이순신 장군과 관노` 표현의 발상이 시대착오적인 봉건적이고 가부장적인 잔재를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고 박원순 시장의 서울시장(葬)이라는 장례절차부터가 문제다. 규정을 떠나 국민적인 상식으로 서울시장(葬)은 순직이나 공무와 관련된 죽음, 또는 서울시민 모두가 공감할 만한 죽음에 한해야 할 것이다. 과연 고 박원순 시장의 죽음이 그러했는가? 서울시장으로서의 공과 또한 아직 평가가 남아있다. 만약 그럼에도 서울시장(葬)의 절차를 선택하려 했다면 최소한 서울시민의 여론을 묻거나 그에 준하는 합의 절차를 거쳤어야 마땅하다. 시간이 촉박했다면 서울시의회를 비롯한 대의기구나 자문기구도 있다. 단적으로 서울시의 소방관을 비롯한 순직 공무원, 직무상 외상후스트레스장애로 인해 자살한 공무원 등에 대해 서울시는 과연 적절한 조치와 보상을 하고 있는가 묻고 싶다.

이러한 예우는 소속정당인 더불어민주당과 문재인 정권의 국정철학을 상징하는 "기회의 균등, 과정의 공정, 결과의 정의"와 전면 배치된다는 점 또한 분명히 하고 싶다. 고 박원순 시장의 서울시장(葬)을 비롯한 예우가 국민적 상식과 서울시민의 여론에 바탕하지 않았다면 이는 민주주의와 민주적 절차에 대한 심각한 위해가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필자는 정치인이기 이전에 기본권을 가진 주권자이자 의무를 다하는 국민으로서 고 박원순 서울시장을 바라보고자 한다. 한 인간으로서의 죽음에는 깊은 조의를 표한다. 반면 고 박원순 서울시장이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타인의 기본권과 인권을 존중했는가 하는 문제는 분명히 밝혀야 할 과제다. 나아가 정쟁을 떠나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오거돈 전 부산시장의 문제 또한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기본권과 인권의 관점에서 엄중히 바라보아야 한다는 소신이다.

이명수 국회의원·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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