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의 실현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공동체의 과제다. 정의의 실현을 위한 구체적 행동이나 정책은 당대 그 공동체의 정치 사회적 상황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정의의 이념 자체에는 공통의 보편적 요소가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보다도 정의에 대한 인지적 혹은 심정적 지각, 즉 정의감은 누구나 모두 공유하고 있는 본성 같은 것이라고 믿어왔다. 물론 그것이 작동하여 행동으로 나타나는 데는 사람마다 차이가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말이다. 나만 그런게 아니라 누구나 그렇게 믿으며 살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요즘 세상이 달라졌는지, 아니면 내가 이제야 세상 보는 눈을 떴는지, 아무튼 사람들이 모두 내가 믿는 것처럼 그런 것 같지 않고, 또 나처럼 그런 믿음을 갖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 정의감이란 걸 아예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도 적잖은 것 같고, 심지어는 불의를 보고 정의라고 우기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본래 태생부터 그런지, 아니면 양육-교육 과정에서 그렇게 변했는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만일 전자라면 이건 정말 진화의 흐름에서 벗어난 돌연변이 변종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진화론, 특히 그 유명한 윌슨이니 도킨스니 하는 분들의 `진화윤리학적`인 주장에 따르면 그런 변종은 대자연이 더 이상 생존과 번영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자연선택`과 `적자생존`의 대원칙에 따라 진행돼 온 거대한 생명 진화의 흐름에서 볼 때 그런 변종은 결국 도태되고 만다는 것이다. 인간이 환경에 가장 훌륭하게 적응한 것은 바로 그가 개체들 간에 서로 배려하고 협조하는 행동방식이 아예 본성 속에 내재하게 된 데 있다는 것이다. `도덕성`이란 것이 하늘에서 내려와 인간의 정신 속에 깃들게 된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생명의 진화 과정에서 도달하게 된 `최적`의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정의감`이란 것이 다름 아니라 `도덕성`의 한 표출일 터이니, 이들의 학설에 따르면, 불의를 보고 정의라고 우길 정도로 정의감에 파탄이 난 인간군이 있다면 그런 변종은 필경 자손번식에 성공하지 못하고 멸종하고 말거라는 것이다. 정의감이 아예 없거나 불의를 보고 정의라고 우기는 사람도 아마 스스로 그렇다고 시인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그들`의 입장에서 취하는 언행을 `그들 밖`의 대다수 사람들이 그렇게 인식하는 거라고 보는게 더 온당할 것이다.
수십만 년의 장구한 세월에 걸쳐 인간의 내면에 자리 잡은 본성으로서의 정의감이 이렇게 입장에 따라 상대화된다는 것은 진화생물학의 관점에서 보면 수용할 수 없는 현상이다. 그런 상대화 현상은 실은 어디엔가 자기기만이 끼어든 결과로 여겨질 뿐이다. 불의를 정의로 둔갑시키는 현란한 논변도 진화윤리학이 제시하는 과학적 명제 앞에서는 그 기만술이 드러나고 말거라는 것이다.
인간종에게 본성이 되다시피 한 정의감이 모두에게 통하는 보편적인 게 아니라면 인간종의 장래는 기약할 수 없는 것이 된다. 근래 인류문명에 대한 거대담론을 펼쳐 우리를 놀라게 하는 하라리 교수도 우리 호모 사피엔스가 이렇듯 모든 생명종을 제압하고 정상에 오르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는 평생 만나 볼일도 없고 만나볼 수도 없는 그 수많은 개인들이 하나의 상상물 아래 공동체를 구성하여 서로 협력하는 데 있다고 역설한다. 특히 지도자라는 사람들, 제발 입장의 차이를 넘어 인간의 본성에 충실함으로써 내가 가져온 믿음이 깨어지지 않게 되길 간절히 바란다. 손동현 우송대 엔디컷칼리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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