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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광장] 정의감의 생물학적 기원

2020-07-14기사 편집 2020-07-14 07: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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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사진1손동현 우송대 엔디컷칼리지 석좌교수
문대통령이 취임사에서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고 말했을 때 모두가 열광한 것을 보면, 민주혁명의 역사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아도 한국인의 사회정의에 대한 열망이 대단한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정의의 실현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공동체의 과제다. 정의의 실현을 위한 구체적 행동이나 정책은 당대 그 공동체의 정치 사회적 상황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정의의 이념 자체에는 공통의 보편적 요소가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보다도 정의에 대한 인지적 혹은 심정적 지각, 즉 정의감은 누구나 모두 공유하고 있는 본성 같은 것이라고 믿어왔다. 물론 그것이 작동하여 행동으로 나타나는 데는 사람마다 차이가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말이다. 나만 그런게 아니라 누구나 그렇게 믿으며 살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요즘 세상이 달라졌는지, 아니면 내가 이제야 세상 보는 눈을 떴는지, 아무튼 사람들이 모두 내가 믿는 것처럼 그런 것 같지 않고, 또 나처럼 그런 믿음을 갖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 정의감이란 걸 아예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도 적잖은 것 같고, 심지어는 불의를 보고 정의라고 우기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본래 태생부터 그런지, 아니면 양육-교육 과정에서 그렇게 변했는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만일 전자라면 이건 정말 진화의 흐름에서 벗어난 돌연변이 변종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진화론, 특히 그 유명한 윌슨이니 도킨스니 하는 분들의 '진화윤리학적'인 주장에 따르면 그런 변종은 대자연이 더 이상 생존과 번영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자연선택'과 '적자생존'의 대원칙에 따라 진행돼 온 거대한 생명 진화의 흐름에서 볼 때 그런 변종은 결국 도태되고 만다는 것이다. 인간이 환경에 가장 훌륭하게 적응한 것은 바로 그가 개체들 간에 서로 배려하고 협조하는 행동방식이 아예 본성 속에 내재하게 된 데 있다는 것이다. '도덕성'이란 것이 하늘에서 내려와 인간의 정신 속에 깃들게 된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생명의 진화 과정에서 도달하게 된 '최적'의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정의감'이란 것이 다름 아니라 '도덕성'의 한 표출일 터이니, 이들의 학설에 따르면, 불의를 보고 정의라고 우길 정도로 정의감에 파탄이 난 인간군이 있다면 그런 변종은 필경 자손번식에 성공하지 못하고 멸종하고 말거라는 것이다. 정의감이 아예 없거나 불의를 보고 정의라고 우기는 사람도 아마 스스로 그렇다고 시인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그들'의 입장에서 취하는 언행을 '그들 밖'의 대다수 사람들이 그렇게 인식하는 거라고 보는게 더 온당할 것이다.

수십만 년의 장구한 세월에 걸쳐 인간의 내면에 자리 잡은 본성으로서의 정의감이 이렇게 입장에 따라 상대화된다는 것은 진화생물학의 관점에서 보면 수용할 수 없는 현상이다. 그런 상대화 현상은 실은 어디엔가 자기기만이 끼어든 결과로 여겨질 뿐이다. 불의를 정의로 둔갑시키는 현란한 논변도 진화윤리학이 제시하는 과학적 명제 앞에서는 그 기만술이 드러나고 말거라는 것이다.

인간종에게 본성이 되다시피 한 정의감이 모두에게 통하는 보편적인 게 아니라면 인간종의 장래는 기약할 수 없는 것이 된다. 근래 인류문명에 대한 거대담론을 펼쳐 우리를 놀라게 하는 하라리 교수도 우리 호모 사피엔스가 이렇듯 모든 생명종을 제압하고 정상에 오르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는 평생 만나 볼일도 없고 만나볼 수도 없는 그 수많은 개인들이 하나의 상상물 아래 공동체를 구성하여 서로 협력하는 데 있다고 역설한다. 특히 지도자라는 사람들, 제발 입장의 차이를 넘어 인간의 본성에 충실함으로써 내가 가져온 믿음이 깨어지지 않게 되길 간절히 바란다. 손동현 우송대 엔디컷칼리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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