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덕 신부·천주교 대전교구 원로사목자
이창덕 신부·천주교 대전교구 원로사목자
사람은 세상에 태어나 이성(理性)을 사용하면서부터는 자기가 인생의 주인공임을 자각하고, 인생의 고귀한 가치관을 담지(擔持)해 목적지를 향한 방향을 설정하며 살아간다.

사람의 일상생활에서 걷는 것처럼 일상적인 것도 없다. 사람들의 걷는 그 행위에는 늘 어느 목적지가 있게 마련이며, 목적지를 향해 걸어가기에 살아간다고 한다. 살아간다는 표현은 오직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말이다. 그래서 설문해자(說文解字)를 보면 사람 인(人)을 사람이 걷는 옆모습의 형상에서 나왔다고 한다.

짐승을 보고 살아간다고 하지는 않는다. 짐승은 살아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목적지가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아직도 어떤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한 구도자임을 체험한다. 그래서 목표를 설정하고 방향을 수정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물론 주변의 영향을 받기도 하겠지만, 최종적으로는 본인이 여러 목표 중 하나를 선택해 설정하고, 본인의 의지를 갖고 노력해 삶의 과정을 가꿔 가기 때문에 일상의 말에 `간다`라는 표현이 많이 있다. 우리는 흔히 `사업이 잘돼 간다`라던가 `이해가 간다`라고 말한다. 인생을 여로(旅路)라고 하고, 역사의 발전을 진보(進步)라고 하며, 사람의 살아가는 모습을 품행(品行)이라고 한다. 변화를 이행(移行)이라고 하며, 축제 때 행렬(行列)을 한다고 한다. 이 모두 어떤 목적의식을 갖고 걷는다는 말이 담겨있다.

사람마다 다른 목표를 갖고 있겠으나, 목적지는 한 곳으로 귀결되게 돼 있다. 이 최종의 목적지에 이르러 그동안의 걸어온 삶이 결산된다. 어떤 이는 최선의 노력에 마무리를 아름답게 하는 반면, 어떤 이는 아쉬움을 가슴에 묻고 삶을 정리한다. 인생에서 가장 힘든 과제일지 모를 그 순간은 삶을 종합하고 결산할 시간인 것이다.

어느 시인이 말했다. "그대가 자신을 위한 투쟁에서 원하는 것을 모두 손에 넣어 세상이 그대를 하루 동안 왕으로 세운다면, 곧장 거울로 가서 그대 모습을 비추어보라. 그리고 거울 속의 인간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보라" 아마도 이 순간만큼은 사람이라면 예외 없이 이 거울 앞에 서게 될 것이다. 자기 삶을 결산하는 순간 주변의 의식이나 위선 없이 자기 응시를 통해 자기 모습 앞에 설 것이다.

그동안 수많은 사람이 이 결산에서 자신들의 진솔한 얘기와 몸짓이 있었다. 세르반테스는 그의 저서 돈키호테에서 당시 유럽 사회의 어떤 진실을 얘기하고 싶었다. 그는 돈키호테를 미치게 해 자신의 어떤 진실을 대변하게 했다. 세르반테스는 임종 전에 "나는 미쳐서 살았고 이제 깨어서 죽는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는 그 책을 통해 목적지를 향한 걸음을 소개했다.

괴테는 늘 밝게 살고 싶어 했다. 그래서 집도 하얗게 칠했다. 그는 임종 전에 창문의 커튼이 드리워진 것을 봤다. 그는 친구에게 마지막 숨을 아껴가며 "나는 좀 더 밝은 곳에 있고 싶다"고 했다. 친구가 커튼을 젖히자 미소를 지으며 숨을 거두었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때로는 고통 속에서도 참 인생의 모습을 발휘했을 터이고, 때로는 비워가는 가슴을 채우려고 방랑의 감정도 있었을 것이며, 표박의 의식이 뒤를 따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일을 하거나 어떤 목적을 위해 길을 걸을 때 지금 가고 있는 목적지가 올바른 곳인지, 또 그 목표와 방법은 바른지 생각하며 방향을 조정할 줄 알아야 한다.

일상에서의 목적지가 의로움에 부합한다면 이 삶을 마무리할 때 참으로 아름다운 미소로 삶을 마무리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신체적 걸음만으로도 여기가 정처가 아님을 안다. 우리는 늘 길을 가고 있음을, 어느 곳인가 정말 이르러야 할 나그네임을 체험한다. 영원한 정처를 마련하기 위해 우리는 오늘도 살아가는 것이다. 이창덕 신부·천주교 대전교구 원로사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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