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형석 공주대 교수
오형석 공주대 교수
여름이 한창인데도 코로나 사태는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다행스럽게 학교 내에서는 대규모의 전파가 일어나지 않는 상황이지만 교사, 학부모, 학생 모두 어렵고 힘든 시간이다. 외국에서는 코로나 블루로 불리는 우울증과 무력감으로 인한 사고가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으며 우리나라 언론 보도에 등장하는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마스크로 인한 충돌 역시 장기간 지속하는 코로나 상황의 영향이 크다. 특히 학교에 가지 못하는 어린 학생들의 스트레스는 상당할 것으로 생각한다. 그들에게 학교는 배움의 공간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친구들과 어울려 놀 수 있는 공간인데 그것이 차단되었으니 놀이의 상실이라는 견디기 힘든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놀이하는 인간이라는 뜻의 `호모 루덴스(Homo Ludens)`란 책을 쓴 네덜란드의 역사학자 호이징아는 인간은 놀고 즐기는 존재라고 주장했다. 단순히 유희를 쫓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을 추구하는 놀이의 과정에서 또 다른 정신적인 창조 활동이 태동할 수 있으며 이것이 인류의 문명을 발전시킬 수 있던 원동력이라고 한 것이다. 또 `공감의 시대`를 집필한 제러미 러프킨은 인간이 가지고 태어난 공감의 능력은 놀이를 통해서 확장된다고 주장했다. 놀이를 통한 탐험이나 역할극 등의 경험으로 확장된 상상력이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는 공감의 마음을 깨닫게 되고, 이것이 즐거움과 삶의 본능을 긍정하는 창조적인 활동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프리드리히 실러는 인간은 문자 그대로 인간인 한에서만 놀이하고, 놀이할 때만 완전한 인간이라고 주장했다. 놀이하는 행위는 인간적 교류를 좋아하고 집단적 신뢰가 있을 때만 가능하기 때문에 인간의 유대감이 가장 잘 드러나는 행위라는 것이다. 이처럼 놀이가 가지는 가치를 생각해보면 교육뿐만 아니라 학교라는 공간에서 놀이 행위를 위한 장소와 방법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1859년 영국에서 대중을 위한 최초의 놀이터가 만들어진 이래 도시의 발전에 따라 아이들을 위한 놀이 공간이 확대되었다. 초기 형태는 단순히 모래를 담아놓은 상자와 같은 모습이었다고 하는데도 아이들이 꽉 찰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그에 반해 너무 화려한 현재의 놀이터는 어떤가. 학교와 아파트, 공원에 가면 카탈로그에서 대충 골라 놓은 듯한 기구들이 덩그러니 놓여 있다. 위에 말한 놀이의 중요성에 비해 그저 유지관리와 기계적인 안전, 그리고 경제성만을 따진 결과물로 보인다. 물론 기구만 바뀐다고 해서 갑자기 다른 놀이터가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놀이터를 계획하는 사람과 이용하는 아이들과 보호자 간 놀이의 행위에 대해 충분한 공감대가 형성되어야 가능하다.

EBS에서 방송된 `위험한 놀이터로 오세요`를 보면 유럽의 놀이터는 우리처럼 안전과 위생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기보다는 어느 정도 통제된 위험 상황을 만들고 이러한 환경에서 문제를 인식하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해준다. 우리나라의 부모가 보면 위험천만해 보이는 것들이지만 작은 위험에 도전하고 좌절하거나 다쳐보는 경험을 통해 나중에 닥칠 큰 어려움을 미리 극복할 수 있는 마음가짐을 아이들이 스스로 자연스럽게 터득하게 한다. 다시 말해 큰 사고를 예방하는 상황을 배우기 위해서 작은 사고를 경험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이 옳으냐 그르냐를 떠나서 아이들이 안전이나 교육적인 측면만 강조된 너무 제한된 놀이터에서 벗어나 자기 주도적으로 놀고 경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 요즘 시국에 더욱 간절하게 느껴진다.

오형석 공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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