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충덕 북칼럼니스트
노충덕 북칼럼니스트
이 세상을 담을 수 있을 만큼 포괄적인 단어는 무엇일까? 우주라거나 인간의 마음이랄 수도 있다. 사랑이나 행복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 듯하다. 사람마다 다르게 가진 암묵적 지식으로 개념화할 수 있다. 어리석지만, 답으로 시간과 공간을 생각한다. 시간은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다. `태초에`로부터 시작하는 구약성서, `삶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라는 공자를 떠올린다. 알 수 없는 시간에서 일부를 인식하려는 의미로 해석한다. 인간은 삶의 편리를 위해 시간과 계절을 정했고, 시계가 소지품이 된 것은 산업혁명 이후의 일이다. 공간은 눈으로 볼 수 있어 시간보다 가늠하기 쉬울지 모른다. 우주의 크기와 거리를 생각하면 공간이 시간보다 짧거나 좁지 않다. 인간은 미미한 존재로 티끌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의 뿌리는 이와 같은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한다. 종교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초월자를 상정하고 인간을 미약한 존재로 설정한다.

시간과 공간에서 인식의 범위를 좁혀본다. 인간은 시간을 역사, 공간을 지리로 이름 지었다. 시간을 연구하면 역사학이고 공간을 연구하면 지리학이다. 제갈공명은 천문과 지리에 통달해 바람이 불어올 방향과 때를 예측했다. 알렉산더는 동방 원정에 학자들을 대동해 공간을 정복하며 시간도 담아두려고 했다. 대항해 시대부터 제국주의 시대에 공간에 대한 관심은 커졌다. 인간의 순수한 호기심은 탐욕으로 바뀌었다. 콜럼버스와 그의 후예들은 아메리카에서 원주민의 목숨과 땅을 빼앗고, 금과 은을 약탈하며 고추와 옥수수를 가져갔다. 대신 주고 간 것은 성병과 천연두다. 아주 불공정한 거래였다. 영국 청교도의 이주에서 출발한 미국은 20세기 중반부터 세계 최강대국이 되었다. 미국은 이미 세계 2차 대전 중에 2,000개의 해외 기지에 무려 3만 개에 달하는 군사 시설을 보유하고 있었다. 지리적 공간의 확대를 유럽인의 시각에서 나열한 것이 곧 서구의 역사다. 이제는 시간과 공간에 대한 관심은 지도자의 자질에서 보통 사람의 삶에 와있다. 내비게이션을 이용해 공간을 이동하고, 해외여행이라도 가게 되면 구글맵을 통해 볼거리, 먹거리는 물론 대중교통의 배차 시간까지 알 수 있다.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이해 부족이 끼친 안타까운 일이 있었다. 2018년 3월 외교부는 직제 개정안 담은 영문 보도자료를 배포하며 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 등 `발틱(Baltic) 3국`을 `발칸(Balkan)`으로 오기했다. 주한 라트비아 대사관의 항의를 받고 나서야 바로잡았다. 외교부 공식 트위터 계정에 `체코`를 `체코슬로바키아`로 잘못 쓰기도 했다. 지리학을 전공하지 않은 전문가의 전문성이 보여 주는 한계다. 신문 기사에 따르면, 볼턴 전 보좌관의 출간 전 원고인 <그것이 일어난 방>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핀란드가 러시아에 속해 있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트럼프는 핀란드가 구소련의 침략에 맞서 독립을 유지하고 있는 사실을 몰랐다. 코로나 19를 겪으며 미국 의료보험 체계의 불평등과 땅이 넓어 문제없다는 공간 인식을 가진 미국의 취약함을 본다. 지리 지식이 이와 같다면 세계 경찰국가의 역할을 그만두기로 한 결심은 다행인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21세기 유라시아에서 미국은 인도-태평양 전략을 강화하고 있다. 중국의 일대일로를 견제하려는 뜻이다. 미국과 중국이 공간을 두고 다투는 범위와 파장은 더 커질 것이다.

과거가 현재를 만들었고 현재가 미래를 만든다. 교육 분야를 살펴보면, 서구의 많은 학교가 지리와 역사를 중요하게 여겨 커리큘럼을 구성한다. 지리와 역사는 개인의 삶과 국가 전략에 토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리와 역사를 너무 소홀하게 다룬다. 섬이 되어버린 한반도를 벗어나는 공간 인식이 절실하다. 길눈이 어두운 사람이 길잡이일 수 없다. 세계를 무대로 살아가야 할 지정학적 운명을 지닌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지리가 아닐까? 노충덕 북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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