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일보 로고

[세평] 4전5기와 실패박물관

2020-06-17 기사
편집 2020-06-17 07:21:49

 

대전일보 > 오피니언 > 사외칼럼

  • 페이스북
  • 구글 플러스
  • 카카오스토리
  • 네이버블로그
  • 네이버밴드
  • 핀터레스트
  • 기사URL 복사

첨부사진1안경남 한국무역협회 대전세종충남기업협의회 회장
일전에 우연히 유튜브에서 홍수환 선수의 4전5기 신화가 담긴 권투 경기 장면을 다시 봤다. 1977년 11월, 11전 11승 11 KO 승을 자랑하는 파나마의 영웅 엑토르 카라스키야에게 2회에만 4번 다운을 당했지만 3회에 믿을 수 없는 투지로 역전 KO승을 거둔 장면은 지금 봐도 감동이다.

화면을 자세히 보니 홍 선수는 4번 다운 당할 때 모두 뒤로 넘어졌다. 권투 경기나 다른 격투 경기에서 다운을 당하는 경우 뒤로 넘어진 선수는 벌떡 일어나 싸울 태세를 갖춘다. 하지만 바닥에 손을 짚고 앞으로 무릎 꿇고 무너진 선수는 대부분 다시 일어나지 못한다.

뒤로 넘어진 사람에게는 넓은 하늘이 보이지만 앞으로 고꾸라진 이에게는 좁은 땅만 눈에 들어온다. 우리나라 국민들은 일반적으로 실패, 특히 사업 실패를 '인생 실패'와 동급으로 여길 정도로 예민하고 부정적 인식이 강하다.

코로나19라는 또 다른 미증유 상황이 전개되면서 기업의 문을 닫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실패의 망령이 고개를 쳐들고 있다. 내수 침체 속에 수출은 코로나19로 인한 세계 교역의 축소 본격화로 4월부터 두 자릿수 감소세를 보이며 부진의 골이 깊어지고 있다.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는 최근 코로나19 충격에 따라 올해 세계 무역액이 전년보다 20% 줄어들 것이라고 전망했다. 코로나19 전인 지난해 영업이익으로 이자도 갚지 못하는 국내 기업의 비율이 34.8%로 역대 최고를 기록했다는 암울한 통계도 나왔다.

미국, 스웨덴, 핀란드, 일본 등 주요 선진국에서는 실패를 부끄러운 것이 아닌 성공에 이르는 과정에서 있을 수 있는 여정의 하나로 인정한다. 미국 실리콘밸리에서는 매년 창업가와 투자자, 디자이너 등이 모여 실패 원인을 분석하고 시행착오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방법을 토론하는 '페일콘(FailCon)' 행사를 연다.

스웨덴에서는 2017년에 실패 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이 박물관에는 세계적 식품기업 크래프트하인즈가 선보였던 초록색 케첩, 프링글스의 무지방 감자칩, 구글의 스마트 안경 '구글글래스' 등 시장에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던 100여 개 제품이 전시돼 있다고 한다.

핀란드는 매년 10월 13일을 '실패의 날'로 지정해 기업인과 교수, 학생 등이 모여 실패 사례를 분석하고 서로의 실패를 축하해주는 행사를 개최한다. 일본에서는 기업, 정부 등이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원인을 찾고 실패 경험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연구하는 '실패학'이 어엿한 학문으로 자리잡았다.

우리나라에서 실패는 '지연된 성공'이 아닌 잘못된 패배로 치부될 뿐 재기의 기회를 잡기가 어려운 게 사실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 조금씩 변화의 조짐이 보인다. 2018년 처음으로 개인·사업·삶의 좌절과 실패 경험을 우리 사회의 자산으로 만들고 함께 공감해 재도전을 응원하는 사회분위기 조성을 위한 '실패박람회'가 열렸다.

지난해에는 대전, 강원, 전주, 대구의 지역 실패박람회와 함께 서울에서는 종합박람회가 열려 분위기 확산에 불을 당겼다. 대전시는 중소벤처기업부와 공동으로 스타트업 파크 안에 전국 최초로 '실패박물관(재도전·혁신캠퍼스)'을 건립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올해 착공 예정인 이 실패박물관은 실패 및 재창업 중소기업을 지원하는 원스톱 플랫폼이자 재도전을 위한 거점 역할을 하게 된다. 세상에 바람과 비에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또 어디 있으랴.

이번 실패박물관이 비록 링에서 쓰러졌어도 다시 일어나 싸우려는 도전의지를 지닌 중소기업들이 '오답노트'를 제대로 만들어 재기의 꽃을 피우며 다시 달릴 수 있도록 희망과 도움의 손을 내미는 계기, 실패에 대한 인식 변화의 출발점이 되기를 소망한다.

안경남 한국무역협회 대전세종충남기업협의회 회장



<저작권자ⓒ대전일보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