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원 삼대] 황석영 지음/ 창비/ 620쪽/ 2만 원

매섭게 춥고 긴긴 밤, 아파트 16 층 높이의 발전소 공장 굴뚝에 올라 고공농성 중인 해고노동자 이진오는 페트병 다섯 개에 죽은 사람들의 이름을 각각 붙여주고 그들에게 말을 걸며 굴뚝 위의 시간을 견딘다. 증조할머니 `주안댁`, 할머니 `신금이`, 어릴 적 동무 `깍새`, 금속노조 노동자 친구 `진기`, 크레인 농성을 버텨낸 노동자 `영숙`을 불러내는 동안 진오는 과거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자신에게 전해진 삶의 의미를 곱씹는다. "그것은 아마도 삶은 지루하고 힘들지만 그래도 지속된다는 믿음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오늘을 살아낸다."

황석영이 장편소설 `철도원 삼대`로 한반도 백년의 역사를 꿰뚫는다. 철도원 가족을 둘러싼 방대한 서사를 통해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전후 그리고 21세기까지 이어지는 노동자와 민중의 삶을 실감나게 다루고, 사료와 옛이야기를 절묘하게 넘나들며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문학적으로 탁월하게 구현해냈다. 또 속도감 넘치는 전개와 실감을 주는 캐릭터로 황석영의 저력과 장편소설의 묘미를 한껏 느낄 수 있다. 남과 북을 잇고, 대륙을 건너는 철도를 꿈꾸는 이 시대에 강렬한 서사의 힘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거니와 구상부터 집필까지 30년이 걸린 작가 필생의 역작이기도 하다.

철도원 삼대는 이백만, 이일철, 이지산으로 이어지는 철도 노동자 삼대와 오늘날 고공농성을 하고 있는 이백만의 증손이자 공장 노동자인 이진오의 이야기가 큰 축을 이룬다. 공장이 밀집된 영등포지역을 중심으로 한 삼대의 서사 속 이일철, 이이철 형제의 이야기는 일제강점기 노동운동과 독립운동을 고증하며 더 큰 울림을 준다.

기차를 보고 첫눈에 반했던 철도공작창 기술자 이백만이 아들을 낳자 기차를 생각하고 지은 이름이 한쇠였고, 그 다음 태어난 아들도 형의 이름을 따라서 두쇠로 지었다가 민적에 올리면서 일철이, 이철이가 됐다. 형 일철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철도종사원양성소를 거쳐 당시 드물었던 조선인 기관수가 돼 이백만의 자랑이 됐으나, 동생 이철은 철도공작창에 다니다 해고당한 뒤 공장노동자를 전전하며 독립운동가로 활동하다 투옥되는 등 고초를 겪는다.

이철과 함께 활동하던 것으로 그려지는 이재유, 김형선, 미야케 등 실존인물이나 이철과 아지트 부부였다가 실제 부부 연을 맺어 아들 장산을 낳게 된 한여옥,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최달영, 이철의 독립운동 연락책을 맡았던 박선옥 등 인물은 형제의 이야기를 더욱 풍성하게 한다.

여기에 황석영이 꿈처럼 그려내는 이야기 속에서 돋보이는 부분은 여성 인물들의 활약이다. 한쇠, 두쇠가 아직 어릴 때 이백만의 아내 주안댁이 세상을 뜨게 되자 백만의 누이동생 이막음이 형제를 돌보게 되고, 주안댁과 막음이 고모는 `혼`으로 소통하며 형제의 경조사를 챙긴다. 또 일철의 아내 신금이는 과거 시동생 이철과 함께 노동운동을 했던 신여성으로서의 지성과 타고난 예지력으로 집안에 닥친 고난을 현명하게 이겨내며 가족을 위로하고 중심을 잡아준다.

저자는 `작가의 말`을 통해 우리 근현대문학에서 단편소설에 비해 훨씬 질과 양이 떨어지는 장편소설 부분과 그중에서도 근대 산업노동자들의 삶을 반영한 소설이 드물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러므로 이 묵직한 한권의 장편소설은 `우리 문학사에서 빠진 산업노동자를 전면에 내세워 그들의 근현대 백 여년에 걸친 삶의 노정을 거쳐 현재 한국 노동자들의 삶의 뿌리를 드러내보고자 한 고투의 기념비적인 결과물이다.박영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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