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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일기] 조심 또 조심해야 할 것

2020-05-29기사 편집 2020-05-29 07:3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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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사진1이윤봉 서산 부석중학교 교사
지난해 김장철에 겪었던 일이다. 나는 큰오빠네로 가서 김장을 돕고 김치를 받아오는, 이를테면 수업시간 모둠활동에서 버스 잘 타는 학생과도 같았다. 일단, 무를 씻고 채칼로 열심히 무채를 만들었다. 그렇게 배추에 속까지 잘 버무려서 김칫통에 차곡차곡 쌓을 때의 부자된 느낌이 다시 김장을 하게 하는 힘이 되는 것 같았다.

그렇게 김장을 하며 주말을 알차게 보낸 뒤 월요일에 학교에 나갔다. 아이들도 집에서 부모님이 김장하는 걸 구경이라도 했을 듯해서 김장으로 대화를 시작해 봤다.

"아이구, 선생님이 주말에 무 10개를 주구장창 썰었더니, 삭신이 다 쑤시네"로 시작했더니, 역시나 여기저기서 엄마를 도와드린 일, 엄마가 힘들어서 안마를 해드렸다는 얘기가 나왔다. 사람 사는 얘기는 아이들과 나를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나게 해주는 것 같았다.

다음 날 교직원 회의 시간, 교감선생님이 전 교원들에게 전달할 말이 있다고 했다. "어제 한 학부모님께 전화가 왔습니다. 어떤 선생님께서 특정 직업인을 비하하는 발언을 하신 것 같다고 하며 조심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의도가 그렇지 않았더라도 받아들이는 학생이나 학부모님 입장에서는 불편했을 수 있으니, 학생들 앞에서 말씀을 조심히 해주세요."

그 순간, 나만 머리가 돌아갔을까. 어제 내가 아이들에게 했던 수많은 이야기 중 몇몇 단어들과 뉘앙스를 빠르게 되뇌었다. 몇 분 안 되는 사이에 나의 뇌는 당을 엄청 소모했을 거다. 그중 어렴풋이 "네가 김치공장에서 무채를 썰어봐야 아, 엄마가 왜 삭신이 쑤셨는지 이해를 하지"라고 말했던 것 같은 기억이 뇌리를 스쳤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 말은 점차 내 머릿속에 가득 찼고, "으이그, 나이 먹고 이게 무슨 짓이야"라며 자책하기에 이르렀다. 그러고는 "그래, 잘못이 있다면 깨끗하게 인정하고 용서를 빌어야지"라고 결심했다.

다음날, 비장한 표정으로 아이들에게 "얘들아, 선생님이 어제 김치공장에서 무채를 썰어봐야 한다는 발언은 김치공장에서 일하시는 분들을 비하하려고 한 말이 아니란다. 혹시나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그렇게 느꼈거나 부모님과 연관이 됐다면 진심으로 사과할게. 절대 그런 의도는 아니었단다."

말을 하면서 아이들의 표정을 살폈을 때, 제법 진지한 표정이었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보였다.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아이들이 "선생님, 무슨 말씀하시는 거에요?", "김치공장 얘기는 뭐에요?", "오늘 선생님들이 왜 그렇게 미안하다고 하나요?"라고 질문했다.

나는 혼자만의 망상인가 싶어서 "선생님이 어제 김장 얘기 하면서 이런 얘기 하지 않았니"라고 묻자 아이들은 "아뇨. 어제 배춧속 버무리는 원기둥 얘기랑 수육 먹은 얘기 했는데요"라고 답했다.

"아, 그래? 선생님이 왜 이러지? 선생님이 좀 아픈가 봐, 병원 좀 가야겠다."

혼자 무슨 망상에 사로잡혔는지, 하지도 않은 이야기를 한 것 같다는 생각으로 시작해서 한 것으로 단정 짓고 쇼를 한 것이었다.

"잠깐, 그런데 선생님들이라고? 나만 그런 게 아니야? 하...'웃프다'는 표현이 이럴 때 쓰는 건가. 나만 그런 게 아니란 것에 위로를 느끼면 난 진짜 지질한 인간이었다. 누군지, 어떤 말인지도 알 수 없었던 교감선생님의 한마디에 소심한 나는 납작 엎드리다 못해 포복을 했던 거다. 누구를 원망하리오. 이런 모습을 본 지인은 "슬퍼지지 않기 위해 내가 지질할 수도 있는 인간임을 받아들여야 한다"며 나를 차분히 다독였다. 이윤봉 서산 부석중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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