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수 끝 의장에 등극, 국가 현안이나 국회 파행 있을 때마다 물밑 정치력(중재) 발휘

`작은 거인` 박병석(68)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삼수 끝에 국회의장 자리에 오른다.

21대 전반기 국회의장 후보로 추대된 박 의원은 여야를 아우르는 통합의 리더십을 자랑하는 관록의 정치인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2000년 16대 총선에서 대전 서구갑에 출마해 당선된 뒤 21대까지 내리 연속 6선을 거머쥐며 무패 행진을 해왔다. 그는 21대 여야를 통틀어 국회 최다선이다.

그는 대전고와 성균관대 법학과를 졸업한 뒤 중앙일보에 기자로 입사했다. 홍콩특파원 시절 유창한 중국어 실력을 토대로 중국 톈안먼(天安門) 사태를 취재하면서 자오쯔양(趙紫陽) 실각을 단독 보도하며 세계적 특종으로 한국기자상을 타기도 했다.

정계에는 1998년 국민회의 수석부대변인으로 입문했다. 외환위기 시절, 당정의 일원으로 경제정책 조정에 관여해 당시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으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았다. 1999년에는 고건 서울시장 시절 정무부시장을 지냈다. 총선 출마를 위해 부시장직을 사퇴하려 했을 때, 당시 고건 전 시장이 크게 만류했다는 후문이다.

국회 입성 직후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직접 전화를 걸어 새천년민주당의 대변인을 맡으라고 통보를 했다는 일화도 있다. 16대 시절에만 국회와 지역구를 오가기 위해 기차를 700번 이상 타는 등 기자 시절 때처럼 현장을 발로 뛰며 민심을 듣는 부지런함과 꼼꼼함도 정평이 나있다. 17대에는 열린우리당 신행정수도 건설위원장과 기획위원장을 맡아 충청권의 가장 큰 정치적 이슈였던 행정수도 문제에 관여해 존재감을 높였다. 18대 총선에선 민주당 후보 가운데 유일하게 대전 지역에서 당선돼 생환하는 뚝심을 보여주기도 했다. 2012년 19대 국회 전반기에는 국회 부의장을 맡았다.

국회의장에는 `삼수` 끝에 오르게 된다. 20대 국회 전반기 의장 경선에는 정세균·문희상 후보에 이어 3위에 머물렀고, 후반기 경선에는 문희상 후보에게 패해 또 한번 고배를 마셨다. 세 번째 도전에선 김진표(5선·경기 수원무) 의원과 양자구도가 형성됐지만, 선수(選數)가 낮은 김 의원이 출마하지 않기로 결정함에 따라 `합의추대`라는 방식으로 입법 수장을 꿰차게 된 것이다.

그는 민생을 최우선으로 하는 합리적 중도개혁주의자로 평가받는다. 야당 의원 중에서도 박 의원을 비판하는 이가 드물다. 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 때는 야당 정책위의장으로 여당과 비공개 협상을 벌여 공전하던 국회를 정상화하는 저력을 보이기도 했다.

2017년 대선에선 공동선대위원장을 맡아 문재인 대통령 당선에 힘을 보태기도 했다. 박 의원은 이번 국회의장 선거 운동을 하면서 초선들에게 손편지를 보내고 의원들에게 케이크를 보내는 등 따뜻한 `아날로그` 감성을 보여주기도 했다. 국회 한중의회외교포럼 회장을 지내기도 한 그는 대표적 `중국통`으로 꼽힌다. 서울=이호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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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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