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희 대전시 성인지정책담당관
김경희 대전시 성인지정책담당관
코로나19로 집단 우울증을 앓고 있는 요즘 `텔레그램 n번방`사건은 보도를 통해 `사회적 트라우마`가 되어간다. 성착취 영상물을 보고 범죄행위를 묵인한 남성들에 대한 분노가 들끓고 관련자 신상공개와 강력처벌을 촉구하는 목소리에 누군가는 두려움에 떨고 있을지도 모른다. 사회적 분노가 끓어오르다 어느 순간 가해자는 사라지고 피해자만 남는 대표적인 범죄행위가 `디지털 성범죄`다. 가해자는 솜방망이 처벌에 그치지만 피해자는 평생 끝없는 고통에 시달리게 된다. 보안성과 익명성을 자랑하는 텔레그램은 소라넷, 웹하드, 다크웹을 거치면서 디지털 성범죄의 무대로 등장했고 공권력을 비웃듯 그 범죄의 양태는 더욱 추악하고 잔인해졌다. 여성과 아동·청소년을 상대로 행해지던 성착취 범죄는 지금까지 엄한 처벌을 받지 않았다. 이러한 사법체계와 작동원리가 오늘날 바뀐 플랫폼에서 새로운 가해자와 피해자들이 나오는 `N번방 사건`의 토양이 됐다.

n번방은 반사회적 바이러스다. 여성의 몸을 돈벌이 수단으로 삼는 데 익숙해진 한국사회의 성착취 구조를 드러낸 것으로 버닝썬 사건 등 사회에 만연한 강간문화의 구조적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음을 다시한번 증명했다. 어떤 이는 `아동 음란물` 내지는 `야동`이라고 말한다. 성인 콘텐츠를 정당한 이용료를 내고 시청한 게 뭐가 잘못인지 항변하는 목소리도 들린다. 그러나 불법촬영물을 유포하거나 소지한 회원들은 단순한 구경꾼이거나 호기심에 이끌린 가입자로 볼 수 없다. 성착취 불법 촬영물이 유포되고 있음을 분명히 알고 기꺼이 입장료까지 지불한 적극 구매자이기 때문이다. 제작·소지·유포하는 모든 행위는 피해자 인격을 살인하는 중대범죄다. 미성년자를 포함해 피해 여성들이 고통받는 모습을 `놀이`로 즐기는 사람은 모두가 공범이다. 호기심으로 지켜보기만 했다고 면죄부를 줘서는 안된다.

디지털 성범죄는 기술 발전에 따라 나날이 더 잔인해지지만 법이 따라가지 못한다. 국회는 그동안 성범죄 처벌 입법에 미온적이었다. 성폭력처벌법 개정안 심의 과정에서 처벌 강화 조항을 모두 빼버리고 디지털 성폭력의 한 유형인 딥페이크(특정인 얼굴을 합성한 음란물) 처벌조항만 신설하는데 그쳤다. 50-60대 남성이 주축이 되어 법을 만드는 국회는 디지털 성착취 피해자 여성들의 고통에 둔감했다. 여성들은 여성의 몸을 경유하는 폭력과 자본을 목도하면서 화장실에서건 친밀한 사람과의 관계에서건 끊임없이 불안을 느끼고 스스로 안전을 책임져야 했다. 버닝썬, N번방의 근본 문제는 일그러진 성문화나 철없던 한 때의 일탈이 아니라 여성의 몸을 매개로 돈을 버는 산업구조 자체다. 수요가 많으니 폭력과 협박으로 여성을 공급하는 시스템 자체가 개선되지 않는다. `모든 남자가 아닌데, 나는 아닌데…` 라고 말하기 전에 사회 구조와 문화를 돌아봐야 한다. 여성을 동등한 인격체로 대우하지 않고 성적 대상으로만 소비하는 남성중심적 한국사회의 구조에 근본 원인이 있다.

사회의 음지에서 곰팡이처럼 확산되는 `n번방`을 근절하려면 강력한 처벌이 필요하다. 피해자의 관점에서 양형기준을 만들고 가해자들에게 이런저런 감형 이유를 적용하지 말아야 한다. 공급은 수요에 따른다. 가입비를 내고 성착취 촬영물을 시청하고 저장하는 이들은 공범자로 처벌해야하고 법적 근거도 마련해야 한다. 성착취 바이러스를 박멸하려면 가해자를 응징해야 한다. 높은 수준의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디지털 성착취는 일부 피해자와 일부 여성만의 문제가 아니다. 함께 분노해야 바꿀 수 있다. 죄가 있으면 벌이 있어야 한다. 디지털 성범죄 재발의 악순환을 이제는 확실히 차단해야 한다. 누군가의 말처럼 피해자가 죽고 가해자가 웃는 세상은 서서히 망해가는 세상이다. 지금 여기서 디지털 성범죄에 제동을 걸지 않으면 우리의 딸들에게 미래는 없다.

김경희 대전시 성인지정책담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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