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그램 n번방·촉법소년 '범죄유희'
범죄자 인권 우선 솜방망이 처벌 문제
법은 공평하고 일관성 있게 적용돼야

송연순 편집부국장 겸 취재 1부장
송연순 편집부국장 겸 취재 1부장
악(惡)은 멀리 있지 않다. 평범한 모습을 한 채 우리 곁으로 다가오곤 한다. 유태인 학살을 주도했던 나치 장교 아돌프 아이히만은 1961년 전 세계 이목이 집중된 전범재판에서 "나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단지 상급자의 지시를 성실하게 수행했을 뿐"이라고 항변했다.

아이히만은 수많은 유태인들을 강제 수용소로 보내는 데 앞장섰던 1급 전범이었지만 가정에서는 더할 나위 없는 남편이자 자상한 아버지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선과 악의 두 가지 상반된 인격이 한 인물 속에서 공존하고 있었다.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의 조주빈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미성년자 등을 협박해 성 착취 동영상을 촬영하도록 하고, 그 영상을 유포해 돈까지 챙겼다. 하지만 그는 다른 한편으론 꾸준히 봉사활동도 하는 등 평범한 삶을 살아온 것으로 알려졌다. 정치이론가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이 떠 올려지는 대목이다.

그동안 법원은 이른바 `몰카` 등 디지털 음란물 관련 범행을 단순히 사회질서를 문란케 하는 일종의 포르노 범죄로 정도로만 인식했다. `n번방` 사건의 저변에는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솜방망이 처벌이 있었다는 지적이 많다. 외국의 경우 아동 포로노 영상을 내려받기만 해도 중형에 처해지는데 반해 우리나라에서 불법 성착취 사이트 운영자조차도 비교적 가벼운 1-2년 형에 그치고 있다.

지난달 29일에는 10대 8명이 서울에서 훔친 렌터카를 타고 대전까지 내려와 시내를 질주하다 경찰의 추격을 받던 중 오토바이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던 대학 신입생(18)을 치어 숨지게 하는 비극적 사건을 초래했다. 이들 가해자는 이전에도 차량 절도 등의 범죄를 오락처럼 즐기면서 사회관계망 서비스(SNS)에 인증 사진을 올리고 자랑했던 사실이 드러났다. 특히 사망사고까지 냈으면서 반성의 기미조차 없었다. 이들은 형사처벌을 받지 않는 만 14세 미만 촉법소년이라는 점을 악용하는 것처럼 보였다. 촉법소년은 만 10세 이상-만 14세 미만 형사미성년자로, 형벌을 받을 만한 범법행위를 했지만 형사책임능력이 없다고 판단돼 보호처분을 받는다. 형사처벌 대신 가정법원 등으로 보내져 감호 위탁, 사회봉사, 소년원 송치 등의 처분을 받는다. 촉법소년 연령을 낮추는 방안 등을 담은 소년법 개정안 법안들은 국회에서 수년째 계류 중이다.

4월 25일은 법의 날이다. 흔히 사람들은 정의는 법으로서 구현될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양형기준과 촉법소년 논란을 지켜보면서 `법이 우리 사회의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가`라는 의문을 갖게 한다.

대법원 중앙 현관에는 정의의 여신상이 있다. 왼손에는 칼 대신 법전을, 오른손에는 저울을 들고 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법과 정의의 여신은 디케(Dike), 아스트라이아(Astraea), 유스티치아(Justitia) 등으로 불리는데 왼손에 `평등의 저울`을, 오른손에는 정의를 상징하는 양날의 칼을 들고 있다. 저울은 법의 형평성을, 칼은 그 법을 엄정하게 집행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낸다. 우리와 달리 외국의 여신상은 유혹을 받지 않고 공정한 판결을 한다는 의미에서 긴 헝겊 천으로 눈을 가리고 있는 모습이다.

우리는 법 앞에서 만인은 평등하며, 누구라도 법을 존중해야 한다는 말을 수 없이 들어왔다.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을 남기며 독배를 마셨다는 얘기도 늘 등장했다. 하지만 법이 반드시 정의를 보장해 주진 않는다. 법은 신이 아닌 인간이 만들기 때문에 완벽하지 못한 게 사실이다. 그러므로 악법은 따르기보다는 폐기하는 것이 마땅하다. 법은 보통 사람들의 상식에 바탕을 두고, 그 상식에 부합해야 한다. 또한 법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고 일관성 있게 적용돼야 한다. 법이 비록 사회 정의를 실현하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피해자의 눈에서 또 눈물을 흘리게 해선 안된다. 법이 피해자의 억울한 눈물을 외면하고 가해자의 인권에만 매달린다면 피해자는 법에 호소하기보다는 사적 보복에 나서게 되면서 사회는 무법천지가 될 수도 있다. 송연순 편집부국장 겸 취재1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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