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을 듣는 방식에는 세 가지 층위가 있다고 아론 코플란드(1900-1990)는 설명한다. 첫 번째 감각적 층위, 두 번째 표현적 층위, 세 번째 순수 음악적 층위이다. 첫 번째 감각적 층위는 말 그대로 음악이 주는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다. 음악이 아름답고 환상적이며 자신을 미지의 세계로 이끄는 힘을 느끼는 것, 있는 그대로의 소리를 듣는 것이다. 마치 처음 커피 향을 느꼈을 때의 황홀함처럼 원초적이며 직관적으로 다가오는 느낌이다.
두 번째 표현적 층위는 음악이 주는 이면의 비밀을 풀고 싶어 하는 마음이다. 음악에 의미 부여의 욕구를 느끼는 것. 숨은 그림을 찾는 재미도 있다. 하지만 작곡가들은 도리어 거추장스러운 의미부여를 거리끼기도 한다. 오죽하면 에릭 사티는 본인의 음악을 가구에 비유했을까. 스트라빈스키도 음악은 삶이 가진 `오브제`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코플란드도 이 단계를 경계했는데, 이 층위에만 빠져있으면 되레 좋아하는 음악이 퇴색될 수 있다.
세 번째 순수음악적 층위는 음악의 전개 과정을 이해하며 듣는 것이다. 이론이 살짝 바탕이 되면야 더 좋겠지만 감상만으로도 이해하는 것은 가능하다. 간혹 음악가들은 작곡가가 적어놓은 토씨 하나도 빠트리지 않기 위해 집념을 보이는데 그로 인해 음악의 흐름을 놓치는 경우를 조심해야 한다.
물론 이 층위들이 음악을 듣는 수준을 결정짓는 것은 아니다. 음악을 듣는 행위는 복합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근거를 하나의 층위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내가 즐기고 있는 모습이 어느 한 부분에 치중되어 있다면 감상의 밸런스를 조절해보면 어떨까. 음악을 듣는 일에서도 균형은 반드시 필요하다. 박상희 피아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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