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의종군은 조선시대 군대 형벌의 하나로 백의란 관직이 없는 상태의 신분을 가리키는 관용적인 표현으로, 한마디로 현대의 보직해임이나 마찬가지인 처벌이다.

이순신 장군은 과거에 급제한 뒤 여러 번 승진하여 1591년 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 됐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해전에서 연전연승을 거두고, 1593년 삼도수군통제사가 됐다.

1597년 조정에서는 `가토 기요마사가 바다를 건너올 것`이라는 일본이 흘린 거짓 정보에 속아 그에게 가토 기요마사를 생포하라 명했다.

이순신은 일본의 계략임을 알고 이에 응하지 않았다가 파직되고 투옥됐다.

이후 우의정 등의 도움으로 간신히 목숨을 구한 이순신은 도원수 권율 밑에서 백의종군하라는 선조의 명을 받았다. 그리하여 이순신은 1597년 4월 1일 옥에서 풀려났다.

백의종군으로 처벌이 끝난 것은, 목숨을 걸고 "이순신 같은 장수에게 기회를 한번 더 줘야 한다."는 간언을 한 정탁과 이원익의 힘이 컸다.

이후 원균이 일본군에 참패하고 전사하자 이순신은 다시 수군통제사로 임명됐다. 그는 곧 명량대첩으로 해상권을 회복했으나 노량해전에서 유탄에 맞아 전사했다.

이순신 장군은 현대 사회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힌다.

그가 쌓은 업적도 업적이지만 위기에 빠진 나라를 위해 싸우면서 임금에게 인정받기는커녕 모함으로 파직까지 당하면서도 백의종군해 끝내 명량해전과 노량해전에서 왜구를 소탕하는 충직함이 그를 존경하는 주된 이유다.

제21대 총선에 나서기 위한 각 정당의 공천이 시작되자 곳곳에서 파열음이 들여온다.

전략공천이라는 낙하산을 만난 후보, 지역구 여론을 무시했다는 후보, 보이지 않는 손에 당했다는 후보, 공천심사가 잘못됐다는 식으로 결과에 불복하고 무소속으로 출마를 선언하고 있다.

물론, 그들은 서로 다른 이유로 억울할 수 있다. 그리고 무소속으로 선거에 출마하는 것도 그들의 자유다.

하지만 무소속을 선택한 이상 그들은 얼마 전 까지 자신이 몸담고 있던 정당의 후보와도 경쟁해야 한다. 몸담았던 정당의 유·불리는 중요하지 않게됐다.

내가 아니면 안된다는 그들에게 백의종군을 바라는 지지자들의 염원은 요원하기만 하다.

차진영 지방부 당진주재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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