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우영 충남대 심리학과 교수
전우영 충남대 심리학과 교수
길고 긴 줄이다. 초대형 건물을 사람들의 줄이 겹겹이 둘러싸고 있다. 이미 서너 시간 전부터 줄을 선 사람들도 많았다. 저 멀리에 잘 보이지도 않는 앞줄만 응시하고 있는 사람들. 줄이 줄어들고 있기는 한 것인지 알 수도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묵묵히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긴 줄은 이곳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비가 내리는 곳에서는 사람들은 우산을 받쳐 든 채로 차례를 기다린다. 좁은 공간에 많은 사람들이 모이면 줄이 구불구불 이어지기도 하지만, 질서는 끝까지 유지되었다. 사고 싶어도 살 수 없던 마스크를 정부가 공급한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시민들은 줄을 서기 시작했다.

코로나19의 공포가 전 세계를 엄습하고 있다. 공포는 유쾌한 정서가 아니다. 하지만 공포는 사람이 경험하는 기본 정서 중 하나로, 우리의 생존에 도움을 준다. 준비 이론에 따르면, 공포는 우리로 하여금 위험에 대비하도록 만든다. 사람들은 공포를 느끼게 되면, 공포를 유발한 원인에 대해 대처하기 위한 준비를 한다. 코로나19에 대한 공포 덕분에 우리는 답답하고 불편하더라도 마스크를 착용하는 것이다.

그 결과, 공포는 우리의 생존 확률을 높인다. 공포를 느껴서 위험에 대한 준비를 할 수 있었던 사람이 공포를 느끼지 못해서 대비를 게을리 했던 사람보다 위험으로부터 살아남을 가능성이 큰 것이다. 따라서 질병을 일으키고, 심지어는 생명을 앗아갈 수도 있는 코로나19와 같은 미지의 감염원에 대해 공포를 느끼는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심리적인 과정인 동시에 우리의 생존 가능성을 높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러한 공포가 우리의 이성을 마비시킬 때 발생한다. 적절한 수준의 공포는 우리를 준비시켜서 위험에 대비하도록 만들지만, 과도한 공포는 우리의 이성을 마비시켜서 비합리적인 의사결정을 하게 만들거나 심지어는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행동을 유도하기도 한다. 인류의 역사는 통제 할 수 없는 공포는 매우 쉽게 혐오와 차별로 변질되고, 결국, 무질서와 폭력을 일으키기도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공포에 의해 점령당한 마음에는 과학과 합리성이 설 자리가 없다. 그리고 과학과 합리성이 무너진 사회는 미지의 질병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없다. 따라서 코로나 19와의 싸움에서는 감염된 사람을 찾아내고, 이들을 치료하는 것만큼이나 사회 구성원들이 느끼고 있는 공포를 관리해야 하는 일이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 코로나19가 불러일으킨 공포를 관리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은, 흥미롭게도, 마스크가 쥐고 있다. 대부분의 시민들은 코로나19와의 전쟁을 수행하는 컨트롤타워인 질병관리본부의 지침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 마스크를 착용하고, 손을 자주 씻고, 기침 예절을 지키고,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하라는 지침을 수행하고 있다. 시민들이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병사처럼 움직이고 있는 셈이다.

이 병사들에게 마스크는 총과 다를 바가 없다. 마스크가 없다는 것은 무방비 상태로 코로나 바이러스와 맞닥뜨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마스크를 착용하라는 메시지를 매일 같이 수도 없이 반복해서 듣고 있는 상황에서 정작 자신에게는 마스크가 없다는 사실은 심각한 공포를 야기할 가능성이 높다. 마스크는 신체적 안전을 위해서도 필요하지만, 공포로부터 우리사회의 심리적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도 필수적인 것이다.

인상적인 것은 우리사회의 시민의식이 공포를 이겨내고 있다는 것이다. 마스크 품귀현상은 우리나라만의 일이 아니다. 일본과 이탈리아에서도 마스크는 동이 났고, 귀한 마스크를 사려면 줄을 서야 했다. 마스크를 사려던 사람들 간에 폭력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폭력은 시민의식이라는 이성이 공포라는 정서를 통제하는 데 실패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줄이 훨씬 더 길고, 오랜 시간을 기다리고, 심지어는 많은 사람들이 마스크를 구매하지도 못한 채 집으로 돌아갔지만, 끝까지 질서가 유지되었다는 것이다. 불평과 불만의 소리가 나왔을 뿐이다. 공포 속에서도 질서라는 시민의식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는 한 우리는 코로나19와의 힘겨운 싸움 중에도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전우영 충남대 심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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