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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덕포럼] 약이 되는 흙

2020-02-18기사 편집 2020-02-18 07:3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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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사진1김광은 한국지질자원연구원 부원장

연암 박지원은 단지 옛 것에만 의존하거나, 옛 것을 무시하고 새 것만 창조하려는 것은 모두 위험하며, 옛 것에 토대를 두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이 좋다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을 주장한 바 있다. 필자는 흙이 신약이 되는 과정을 지켜보며 법고창신을 떠올렸다.

지난해 발간돼 화제가 되고 있는 '약국에 없는 약 이야기'라는 책에 따르면 약은 생존, 불로불사, 쾌락 등 인간 욕망의 도구이기 때문에 고대부터 지금까지 약물이 될 수 있는 물질에 대한 탐색이 끊임없이 진행되고 있는데, 하찮거나 효과가 없어 보이는 물질이 약의 재료로 쓰이는 것은 꽤 보편적인 현상이라고 한다.

이 책에는 고대 그리스로마시대에 대유행했던 흙으로 만든 만병통치약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저자는 이를 약의 원료인 흙이 당시에 신성시되던 섬의 것이라는 점과 알약의 색깔과 염소 문양 등에 의한 플라시보 효과로 풀이하고 있다. 그러나 당대의 의사이자 현대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도 흙의 약효에 대해 기록했던 바 있다.

동양에서도 예로부터 흙을 지사제, 철분보충제, 지혈제 등의 약재로 사용해 왔다. 허준의 동의보감과 중화본초(중국의 국가중의약관리국에서 발간한 사상 최대 규모의 전통약물 총서)에도 각기 100종이 넘는 광물계 약재가 수록돼 있다. 동의보감에는 호황토(好黃土)라는 흙에 대해 '성질이 평하고 맛이 달며 독이 없다. 설사와 적백이질, 열독으로 뱃속이 비트는 것같이 아픈 것을 치료한다. 땅 밑 3자 아래의 흙만 참흙(진토)으로 이를 사용해야 한다'고 기록돼 있다.

이와 같은 고대로부터의 경험적 지식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어 현재 우리나라 식품의약품안전처 법령에는 의약품, 동물용 의약품, 식품첨가물, 화장품 원료로 벤토나이트, 일라이트 등 14종의 점토광물이 등록되어 있다. 점토는 지름이 0.002mm이하의 미세한 흙입자를 말하는데, 우리나라에는 다양한 점토광물이 풍부하게 분포하고 있다.

우리나라 동남부에 많이 분포하고 있는 벤토나이트라는 점토에는 스멕타이트라는 광물이 많이 들어 있다. 스멕타이트는 시중에 판매되고 있는 설사약의 원료로 쓰이고 있다. 매우 강한 흡착력을 갖고 있어 장관을 통과하면서 물이나 병원성 세균, 독소, 바이러스를 흡착해 배설하는 작용을 한다. 약성분이 체내로 흡수되는 것이 아니라 장관을 그대로 통과하기 때문에 인체에 미치는 부작용도 적다고 알려져 있다.

우리 정부는 국가연구개발사업으로 다양한 종류의 흙을 이용한 새로운 의약품 개발을 추진하고 있다. 한국지질자원연구원은 한국식품연구원, 서울대 약대, 강남세브란스병원 등과 함께 흙을 원료로 하는 신약 후보 물질을 개발하기 위한 연구를 진행 중이다. 지질학, 식품학, 약학 전문가들은 물론 의료계도 함께 협력하는 융복합연구인데, 이미 위장질환 치료제 및 간암 항암제 분야에서 어느 정도 성과가 나오기 시작했다.

기존 간암 표적항암제는 용해도가 낮아 체내흡수율이 떨어지는 문제점을 갖고 있는데, 벤토나이트 점토광물을 약물 전달체로 사용해 복합체 형태로 복용하면 체내흡수율이 20배 이상 개선됨이 동물실험 결과 확인됐다. 또한 벤토나이트를 이용하여 각종 위장질환의 원인균인 헬리코박터균을 더 효과적으로 제균할 수 있는 기술도 개발완료 단계다. 한국지질자원연구원은 이와 같이 흙을 원료로 신기술을 적용하여 개발된 신약 후보물질 5종을 지난해 말 국내 바이오 기업에 이전한 바 있다.

예로부터 약의 원료로 사용되던 흙에 현대의 첨단 융복합 기술을 더해 새로운 신약 후보 물질들을 만들어 내고 있으니, 옛것에 토대를 두되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는 법고창신이란 고사성어가 제격이다. 법고창신론을 주장했던 연암이 약이 되는 흙 얘기를 듣는다면 어떤 생각을 할까?

김광은 한국지질자원연구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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