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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밭춘추] 걸어가는 사람

2020-02-07기사 편집 2020-02-07 07:4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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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사진1김주원 극단 백 개 무대 대표 (극작가·배우)
계절도 모르고 사는지, 나무가 보고 싶어 동학사까지 산책을 갔다가 비쩍 마른 나뭇가지들을 마주쳐서야 겨울임을 깨달았다. 바보 같은 짓에 어처구니가 없으면서도, 앙상한 나무들이나마 '자연'을 구경하고 왔으니 감사하다 싶었다. 자연을 모방하는 인간의 본능 덕분인지, 머릿속이 복잡해지면 자연경치를 보고 오는 게 신기하게도 창작에 도움이 되곤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쟁으로 자연이고 풍경이고 모두 파괴된 시절엔 예술이 뭘 따라가야 했을까. 부조리극 '고도를 기다리며'의 무대는(극 중 표현대로) 목을 매달 수도 없는 앙상한 가지의 나무 한 그루뿐이다. 나는 겨울나무들을 보며 '고도를 기다리며'가 떠올랐다. 언뜻 보면 절대 이해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내용인데, 많은 사람들이 열광하고 고전으로 남아 계속될 '부조리극'의 대표작.

부조리극은 전쟁을 겪으며 탄생했다. 사람들은 전쟁으로 자신들의 신념이나 세계관이 무너지는 것을 처절하게 경험했다. 꼭 전쟁이 아니더라도, 세상이 자꾸만 부조리함으로 나아가는 것을 우리는 늘 보고 겪고 있다. 우리가 배운 이치나 인과관계의 타당성을 비웃듯, 세상에는 변칙과 우연이 너무 쉽게 끼어든다. 그 뻔뻔한 꼴만을 보고 있으면 염세주의에 빠지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다.

그 탄생배경부터 극의 양식까지, 부조리극은 그래서 언뜻 보면 굉장한 비관론을 담은 것처럼 보인다. 극 중 인물들의 대화는 끊임없이 희망을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마치 인간들의 헛된 희망을 비웃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부조리극에서 말하는 그것이야말로 진실한 희망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우리가 배운 세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고도를 기다리며'의 무대디자인을 맡았던 조각가 '알베르토 자코메티'가 말했다. 모든 것을 잃었을 때, 모든 것을 포기하는 대신 끊임없이 걸어가야 한다고. 물론 굳이 그런 철학을 끼워 넣지 않더라도, 우리는 이미 계속해서 걸어가고 있다. 목을 매달 수도 없는 나무 한 그루뿐인 무대에서, 끊임없이 신발 끈을 매고, 당근을 먹고, 되도 않는 대화를 늘어놓는 등 온갖 무의미한 일들을 벌이며 유의미한 것을 기다리는 것. 그렇게 걸어가는 것이 삶이라는 것을 우리 모두는 배우지 않아도 알고 있기 때문에. 앙상한 나뭇가지에 아직 떨어지지 않은 잎사귀 하나에서도 희망을 찾을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우리들이 아닌가.



김주원 극단 백 개의 무대 대표 (극작가·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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