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력 1월 1일 구정 또는 음력설로 불리는 최대 명절중 하나인 설이 며칠 남지 않았다. 설이라는 이름의 유래에는 세가지 설(說)이 있는데 새로온 날이 낯설다는 의미에서 낯설다의 어근인 `설다`에서 온 것으로 보는 시각과 한해가 새롭게 개시되는 날을 의미하는 `선날`이 설날로 바뀌었다는 시각, 그리고 자중하고 근신한다는 의미의 옛말인 `섦다`에서 왔다고 보는 시각이 존재한다.

설이면 아껴두었던 설빔을 입고 큰댁으로 가던 길은 항상 추운 날씨에 코와 볼이 빨갛게 변하며 입김이 후후 나는 길이었다. 큰댁과 우리집은 대전 같은 동네에 사는 이웃이었고 지금 생각하면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였지만 그때는 좁고 넓은 골목을 구비구비 돌아 딴 생각에라도 빠져버리면 엉뚱한 길로 들어서 한참을 돌아가야 하는 골목길이었다. 뜨개실로 떠주신 벙어리장갑을 끼고 뛰어가던 골목길은 동년배의 사촌형제들과 놀이를 하며 즐거워 할 시간과 새뱃돈으로 얼만큼 두둑해질까 하는 설레임으로 가득했던 유년기의 기억이다. 큰댁은 감나무와 대추나무가 마당에서 자라고, 안방과 건너방 사이에 대청마루가 있는 한옥이었다. 우리의 한옥은 마당을 중심으로 모든 공간들이 열려 있기도 하고 닫히기도 하는, 소통하고 함께하며, 서로 나누는 마당 넓은 집이다. 마당은 햇빛이 있고 사계절이 있어 자연을 느끼며 함께하는 공간이다. 봄이면 새들이 찾아오고, 여름이면 마당 평상에 누워 하늘의 별을 세며 옥수수를 구워먹고 가을이면 감나무의 감을 따다 나무에서 떨어지기도 하고, 겨울이면 쌓인 눈에 먼저 발자국을 내며 1등임을 자랑스러워 하는 잔치에는 마당에 천막을 쳐놓고 전을 부치고 동네어르신들과 음식을 나누며 웃음꽃을 피운다. 이러한 한옥의 평면구조는 아파트와 단독주택 등 현재의 주택구조에 그대로 계승돼 있다. 외부의 형태는 서양의 형식을 가져왔으나 현관을 들어서면 마당의 역할인 거실이 보이고 이를 중심으로 각방으로 출입하는 구조는 전형적인 한옥배치를 따른 것이다.

하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아파트의 구조는 3-bay,4-bay 등 거실의 중심이 아닌 개인적 공간으로 변해 문을 닫음과 동시에 소통되지 않는 주거구조로 변화되고 있다. 옛 주거공간은 소리와 빛을 품은 채 공간만을 구획하는 구조로 시시각각 변화했던 자연을 소통하며 살아왔던 공간이 실내로 구성, 유입되면서 자연의 변화는 미디어로 대체되어 인간의 활동범위가 점점 실내로 국한되고, 주거에서 업무, 교육, 레저에 이르기까지 기계적설비와 인테리어의 변화만을 꾀할뿐 발코니 없는 아파트 창문없는 고시원·고층건물 중심의 업무공간 등 사람에게 소통할 수 있는 공간과 자연은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서양의 도시계획은 주거공간을 벗어나면 어디든 쉽게 머물 수 있는 공원이 있는 반면 우리네 도시계획은 택지와 차로로 구성된 땅 나누기일뿐 어디에도 사람의 삶과 자연은 존재하지않는다.

우리는 비오는 날 우산 없이 하루를 지낼 수 있는 건축물속에 살고있다. 삶의 가치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사람과 자연과 건축이 함께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건축에 있어서 창의적 공간은 그 목적성이 정해져 있지않은 남는 공간, 그래서 그 무엇도 될 수 있는 공간이다. 정해져 있지 않아 변화가 많고 예기치 않은 우연이라 말할 수 있는 공간이야말로 우리의 삶과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설날이 다가오면 생각나는 내 기억 속의 마당과 골목길은 나무와 햇빛과 눈과 입김이 나는 기억의 공간이다. 20년 후 지금의 나는 어떤 공간 속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기억이 될까. 모든 분들에게 즐겁고 행복한 설 명절로 떠올려지기를 기대한다.

김양희 충남건축사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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