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광석 신부
한광석 신부
새해를 맞으며 여러 덕담을 나누지만 실제의 삶은 만만치 않다. 계획대로 잘 풀리는 일은 거의 없고,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괴로운 일과 사람에 시달리며 산다. 이렇게 겪는 악과 고통 앞에서 자유로운 사람이나 종교가 과연 있을까? 그래서인지 많은 종교도 고통을 중요하게 다루는데, 신이 없다는 쪽이면 대답은 간단하다. 그러나 신이 있다는 입장이라면 대답은 복잡해진다. 선한 신과 현실의 악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은 논리적 모순이기 때문이다. 신이 존재한다면, 도대체 우리는 왜 힘든 삶을 사는 것일까? 이런 질문 앞에서 그리스도교 입장으로 살펴보면 악의 종류는 다양하다.

첫째, 개인의 잘못에서 나오는 윤리적인 차원의 악이 있다. 비인간적 행위, 폭력, 살인, 전쟁 등 인간 스스로 행하는 악행들 때문에 세상에 악이 존재한다. 인간이 선한 일을 하면 상을 받고 죄를 지으면 고통을 당한다는 `상선벌악`은 거의 모든 문화권에서 존재하는 것처럼, 성경에도 오랜 전통으로 자리한다.

둘째, 개인의 잘못과 상관없는 자연재해를 포함한 사고와 재앙이 있다. 태풍, 지진, 쓰나미 등의 자연재해는 피해를 입은 사람에겐 악이 분명하다. 그러나 자연의 활동 자체는 악이라 할 수 없는 중립적인 것이다. 자연은 살아있는 생명체이고 생성, 변화, 소멸의 과정은 말 그대로 자연스런 현상이기 때문이다. 미생물이나 바이러스가 인체 내에서 무질서하게 증식하면 병이 되지만, 이것들이 없으면 생명체는 생존과 소멸을 할 수 없는 이치와 같다. 이렇게 보면 수많은 형태의 불행, 곧 암을 비롯한 질병, 치매, 불치병, 교통사고와 죽음은 사람의 잘못에서 오는 것도 있지만, 꼭 그렇지 않은 것도 얼마든지 있다. 성경의 인물 중에서 의인으로 알려진 `욥`이 당한 엄청난 고통도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셋째, 공동체 차원의 악이 존재한다. 곧 내가 겪는 악의 내용이 가난, 경제적 여건, 성적 불평등 때문이라면, 이는 인간이 만든 구조에서 오는 것이다. 비록 가난해도 가진 것을 골고루 나누며 사는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하느님이 원하실 인간 사회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우리에게 풍요로움을 주지만, 상대적 빈곤과 불평등을 일으키며 무한경쟁을 부추기는 지금의 경제구조에 악의 모습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많은 경우 세상의 악은 우리가 막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발생하고 있다. 지구 온난화로 인한 자연재해도 우리가 함께 노력한다면 예방이 가능한 일인데, 고통 앞에서 신의 책임만 묻는 것은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의 무책임이 아닐까 한다.

지금도 끊임없이 마주하는 개인적인 악과 구조적인 악에 대해 때론 어떻게 극복하고, 때론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된다. 이해하기 어려운 신비차원의 고통 곧, 자신의 깊은 내면으로 들어가는 선물로 주어지는 고통도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악을 정당화해서는 안 되지만, 선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무엇으로 볼 여지도 있는 것이다. 또한 이웃을 위해 받아들이는 고통도 있다는 것이 그리스도교 십자가의 가르침이다. 그래서 악과 고통은 처세술이나 해결의 문제가 아니라 `받아들임`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늘 고난을 겪겠지만 홀로 버려지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과 함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고 격려한다. 삶에 있어서 고통이 다가 아니기에, 충분히 살아볼 가치가 있는 이유이다.

한광석 신부·대전가톨릭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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