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동부터 현재까지

1950년 대전일보 제호. 대전일보 신문박물관
1950년 대전일보 제호. 대전일보 신문박물관
1950년 10월, 한국 전쟁이 한창이던 시기였다. 피란민은 남행길을 택했고, 대전·충청도민은 삶과 죽음을 넘나들고 있었다. 무엇보다 전쟁소식이 궁금했을 테다. 대부분의 방송사나 신문사가 전쟁으로 파괴돼 소식을 접할 길이 없었다. 언론의 부재는 곧 유언비어의 양산으로 이어졌다. 전황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는 매체가 필요했다. 하나 둘 씩 모아진 당시 지역민들의 소망은 신문을 창간하기에 이른다.

1950년 11월 1일, 16절지 크기 1장의 신문이 전시속보판형태로 발행됐다. 임시제호는 `대전일보(大田日報)`, 가격은 20원이었다. 대전일보의 태동이자 역사의 시작이었다. 머릿기사에는 `유엔 해군기(海軍機) 적진을 맹공, B29편대 청진을 폭격`이란 기사가 실렸다. 전쟁상황을 생생하게 담아낸 대전일보는 불티나게 팔렸다. 속보판의 원고는 당시 `승리당`이라는 빵집의 2층 좁은 공간에서 쓰여졌다. 인쇄시설이 열악해 신문을 발행하지 못한 날도 있었다.

대전일보는 전시속보판 발행 후 열흘 뒤, 1950년 11월 11일 공식 창간했다. `철군 명령 결의안 통과 확실시`, `청천강 전선서 총공격 개시`, `적의 저항 물리치고 북진 중`, `유엔공군 중공의 보급선 맹폭`, `유엔공군 신의주 회령 등 맹폭`, `연합군 박천 영변에 돌입` 등 창간 후 며칠간 신문에 새겨진 기사들은 대전·충남지역 유일한 신문으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배달이 어려워 직원이나 판매 소년들이 거리에서 직접 판매했다. 전쟁 소식에 목마른 피란민과 대전 시민들에게 대전일보는 단비와 같았다. 대전일보 논설위원을 지낸 정훈 시인이 1970년 11월 11일 창간 20주년 기념호에 담은 축시에서 당시 상황을 엿볼 수 있다. `손바닥만한 종이쪽지/그렇게 초라한 신문을 옆에 끼고/잿더미 거리를 누비며 달리던/신문팔이 애놈들을 진정 잊을 수가 없다/우리들의 귀요/눈이요/힘이었기에(중략)`.

1950년대 전쟁의 폐허 속에서 갖은 고초를 겪었던 대전일보는 1960년대 들어서면서 도약의 발판을 마련한다. 영봉 남정섭 사장이 1963년 취임하면서다. 법조인 출신으로 언론의 기능과 역할에 관심이 높았던 남정섭 사장은 대전일보 인수와 동시에 신 사옥 신축, 부채 청산 등 현대화를 이룩했다.

대전일보가 사세확장에 박차를 가한 시기는 1960년대 중반 이후부터로 볼 수 있다.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에 이르면서 수습기자 공채시험을 제도화하고 첫 컬러판을 내놓기 시작했다. 지면 또한 매주 36면으로 대폭 증면했다. 1974년 11월 1일부터는 주 36면에서 48면(매일 8면)으로 전국지와 똑같은 지면 수를 확보했다. 1970년대는 근대화가 급진전되기 시작한 때로 경부고속도로 건설과 대전·천안에 공단 조성이 추진됐다. 대전일보는 지역발전을 위해 현장의 모습을 지면에 충실히 담아냈다. 때로는 중앙정부를 매섭게 질타하면서 충청권 발전을 위한 관심과 투자를 촉구했다.

격동기인 1980년대를 앞두고 대전일보는 `모든 정보를 대전일보에 담자`라는 소신으로 주독지화(主讀紙化)에 나선다. 당시 취임한 남재두 사장의 의지이자 `글로컬리즘(Glocalism)`의 시작이기도 했다.

충청권 신문업계도 무한 경쟁시대로 돌입하던 차였다. 시장경쟁 원칙에 따라 치열한 노력이 필요했다. 이에 대응하고자 대전일보는 1988년 4월 1일부터는 매일 16면으로 증면, 서대전 4거리 공원 조성, 대전둔산공원 살리기, 공해추방운동 등 각종 현안에 대안을 제시하고 여론을 환기시켰다.

창간 40주년을 맞이한 1990년에는 대대적인 제작 시설 현대화에 착수했다. 신문제작 시간을 단축하고 선명한 인쇄를 위해 CTS(Computerized typesetting system, 컴퓨터 사식 조판 시스템)를 도입했다. 지역 유력 신문과 함께 워싱턴, 파리, 홍콩, 도쿄 등 해외 곳곳에 특파원을 파견하면서 세계화 흐름에도 합류했다. 1996년부터는 매일 28면을 발행하고 석간에서 조간으로 발행시간을 바꾸고, 전면 가로쓰기로 전환했다.

대전일보는 2003년 8월 27일 현재의 대전 서구 갈마동 사옥으로 이전하면서 제 2창간을 선언했다. 대전의 도심 기능이 구도심에서 둔산권으로 이동하면서 이에 부응하기 위한 판단이었다. 2006년에는 한불수교 120주년을 맞이해 20세기 세계 미술계 거장인 조르주 루오의 작품전시회를 열었다. 2016년 10월에는 93일 간 `대전 국제포토저널리즘전(展)`을 개최했다. 유럽 최고 권위와 명망을 자랑하는 국제포토저널리즘 페스티벌인 프랑스의 `비자 뿌르 리마쥬-페르피냥 (Visa pour l`Image-Perpignan)`을 국내 최초로 유치, 6개국 11명의 기자가 전 세계 취재현장을 누비며 촬영한 사진 작품 257점을 선보였다.

전시속보판으로 시작한 대전일보는 2020년 창간 70주년을 맞이했다. 충청권 대표 일간지로 묵묵히 걸어온 70년의 역사는 지난 세월 세상의 온갖 표정이 담겨 있다. 지역사회에서 발생한 다양한 사건과 사고,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이야기까지…. 대전일보는 지역 발전을 위해 뛰어온 지난 날을 도움닫기 삼아 새로운 미래를 그리고 있다.

김대욱 기자·<참고 및 도움= 대전일보 60년사, 대전일보 신문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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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일보 60년사. 대전일보 신문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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