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종태 대전 서구청장
장종태 대전 서구청장
기억도 결국 몸의 일인지라 세월이 흐를수록 감퇴하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소소한 기념일은 따로 메모해두지 않으면 잊어버리기 일쑤다. 반면 어떤 일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선명해지기도 한다.

처음 공직에 몸담던 날, 구청장으로 처음 집무를 시작하던 날을 여전히 기억한다. 전화 통화만 하다가 부여의 한 찻집에서 아내를 처음 만났던 가슴 떨리던 순간은 아직도 생생하다.

어려운 고학생 처지를 안타까워하던 선생님의 기억도 뚜렷하다. 그 선생님이 손을 잡고 데려갔던 학교 앞 빵집을 떠올리면 지금도 입에 침이 고인다. 잊지 않으려면 기록해야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천재나 위인 중 상당수는 메모광이었다. 링컨은 모자 안에 항상 종이와 펜을 휴대했다고 한다. 천재 예술가이자 과학자였던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30년간 기록한 메모는 수천 장에 달했다. 그가 의학, 과학, 문학, 예술 등 여러 방면에서 탁월한 융합형 인재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이다.

다산 정약용은 독서광이자 메모광이었다. 독서로 깨달은 것을 모두 기록으로 남겼다. 18년 동안 유배 생활에서 메모했던 자료를 모아 남긴 저서가 500여 권에 달한다. 수사차록법(隨思箚錄法).

생각이 떠오르면 수시로 메모하는 것이 다산의 기억법이었다. 메모의 중요성을 알면서도 그러지 못하는 필자 같은 범부(凡夫)에게 유용한 기억법은 숫자로 기억하는 것이다.

특별한 의미가 없는데도 100일, 1000일 등을 굳이 기념일로 새기는 가장 큰 이유는 잊지 않기 위해서다. 사랑에 빠진 젊은 연인도, 치유할 수 없는 아픈 상처를 간직한 사람도 잊지 않기 위해 날짜를 센다. 운동선수가 100골, 100홈런 등을 셈하는 이유는 첫 골, 첫 홈런 등을 잊지 않기 위해서다.

물론 우리는 안다. 99일과 100일 사이에는 특별한 차이가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하지만 처음 가졌던 마음과 각오가 시간이 흐르면 변한다는 사실을 더 잘 알기에 날짜를 세고 기념일을 만든다. 2019년 12월 21일은 서구청장으로 취임한 지 꼭 2000일이 된 날이다.

2014년 7월 1일, 세월호의 아픔과 추모 분위기가 채 가시지 않았던 때였다. 최대한 간소하게 취임식을 하고 지역의 중증장애인 시설에서 봉사활동으로 첫 집무를 시작했다. 취임 선서와 함께 구민들에게 약속했다. 작은 목소리에도 귀 기울이며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하는 구청장이 되겠다고, 사람을 우선하는 따뜻한 행정을 펼치겠다고 말이다.

1000일째 되던 날도 엊그제 일처럼 생생하다. 특별한 행사는 없었다.

구내식당에서 떡을 나눠주고, 직원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가졌다. 취임 2000일이라고 해서 특별하지 않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안다. 1999일째 되는 날과 크게 다르지도 않을 것이다. 당연히 무슨 행사를 여는 것도 아니다. 그래도 이날을 기억하고 마음속으로나마 기념하는 것은 역시 잊지 않기 위해서다. 취임하며 가졌던 다짐, 구민들과 직원들에게 했던 약속, 구청장으로서의 첫 집무를 하며 다졌던 각오를 말이다.

또 2000일 동안 달려오며 잘한 일을 되새기고, 잘못한 일은 반성하기 위해서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1일 차 때의 마음과 각오를 소환한다. 새로운 해가 곧 떠오른다. 2020이라는 숫자는 언제 들어도 먼 미래처럼 들린다. 영화나 소설에서 자동차가 하늘을 날고, 로봇이 사람의 일을 대체하고, 기술 발전으로 지구가 바뀐 모습으로 등장하던 해가 이 무렵이었다.

오지 않을 것 같던 그 먼 미래가 현재가 됐다. 여전히 미래 같은 2020년 역시 머지않아 과거가 될 것이다. 그러고 보면 주춤거리고 머뭇거릴 시간이 우리에겐 없다. 먼 훗날의 일로 계획했던 일을 미루지 말고 당장 실행에 옮겨보면 어떨까.

대전 서구가 새해 사자성어로 `옳다고 믿는 바를 곧바로 실행에 옮긴다`는 뜻의 신심직행(信心直行)으로 선정한 이유다. 취임 2000일, 그리고 2020년 새해를 맞는 다짐이기도 하다.

장종태 대전 서구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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