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미 대전대 교수
조정미 대전대 교수
필자는 고양이 한 마리를 키우고 있다. 회색 줄무늬 코트에 콧망울이 빨간 아메리칸 쇼트헤어 수놈인데 벌써 10살이나 됐으니, 사람으로 치면 슬슬 노인 축에 든다. 사람보다 빠르게 나이가 들어가는 터라 천방지축 어린 시절은 가버리고, 이제는 필자가 밤늦게까지 일을 하고 있으면, 슬쩍 다가와 응원이라도 하듯 곁을 지킨다. 이제는 이 아이가 고양이인지 사람인지 헷갈리기도 한다.

몇 년 전 아파트를 떠나 주택으로 이사를 했다. 주택살이가 좋은 점은 주변의 작은 생명들을 가까이서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이사 후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낯선 길냥이 한 마리가 마당에 들어와서 나를 보고 인사라도 하듯 냥냥거렸다. 그해 봄에 태어난 햇고양이인 듯 아직 몸집도 작고, 걸을 때 보니 뒷다리를 조금 절었다. 딱한 마음에 계단 밑에 밥을 놓아주게 됐는데, 이 인연이 벌써 수년째다. 저녁 퇴근길이면 어김없이 나타나서 반겨준다. 가끔은 쥐를 잡아서 현관 앞에 놓아두고 가기도 하는데, 보은의 선물이라고 내 맘대로 생각하고 흐믓해 한다.

앵앵이라고 이름 붙힌 이 길냥이 덕에 무심코 지나치던 작은 생물들의 세계가 눈앞에 열렸다. 계절이 바뀌고 자연의 섭리대로 앵앵이도 새끼가 들어 배가 불러왔다. 이 사태를 어찌하면 좋을지? 어느 나라 속담에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면, 밥도 먹여 줘야 한다고 했다. 묘생에 임의로 개입했으니 이 또한 내 탓이다. 새벽마다 동태를 살폈는데, 드디어 일이 터졌다. 집 울안에 나뭇잎 몇 장 물어다 놓고 출산을 한 것이다. 달걀만한 새끼 고양이 다섯 마리가 꼬물꼬물…. 결론적으로 이후의 일은 동네 분들의 도움으로 해피엔딩이 됐다.

우선 길냥이 개체 수가 대책 없이 늘어난다는 민원이 있을 수 있다. 이것이 제일 걱정이었다. 그렇지만 새끼들이 웬만큼 자라자 어느 날 흩어져 사라져버렸다. 앵앵이가 새끼들을 찾아달라고, 따라다니며 사정을 해대서 온 동네 뒤져 봤지만, 흔적이 없었다. 자연적으로 자신의 영역을 찾아 나가는 것 같았다. 앵앵이는 앞집 아주머니가 데려다 자비를 들여서 불임시술을 시켜줬다. 이 댁에서는 유기견을 두 마리나 입양해서 보살피고 있는데 정말 고마운 일이다.

겨울이 되면 도시의 야생동물들에게 가장 가혹한 것은 먹을 물이 없다는 것이다. 물그릇이 얼어붙어서 하루에 몇 번씩 더운물을 갈아줘도 소용이 없다. 이 사정을 아시는 동네 분이 마당의 수돗물을 큰 그릇에 늘 담아 두어 길냥이와 까치들이 물을 마시러 온다. 올해도 닭의 조류독감, 돼지 구제역 등 가축병이 돌아서 닭은 몇백만 마리, 돼지는 몇십만 마리씩 생으로 살처분됐다. 내년에는 또 어떻게 할건가! 이것들이 죽어가며 당했을 고통은 그냥 어딘가로 사라졌을까? 절대 그렇지 않다. 그대로 인간에게 돌아와 되먹임된다. 가축들이 돌림병에 약한 것은 좁은 케이지에 밀어 넣고 키우는 공장식 사육 탓이다. 면역력이 없으니, 항생제 범벅이 된 사료를 먹여야 하고, 도살될 때나 했빛을 볼 수 있는 가혹한 환경 탓에 스트레스로 인한 독성물질이 체내에 쌓이게 된다. 이것을 사람이 먹는다. 이런 장면을 마주하면 인간이 된 것이 부끄럽다.

이런 반론이 있을 수 있다. 인간들도 전쟁과 기아로 수없이 죽어가는데 동물들이 뭐그리 대수냐고. 그러나 필요를 앞세워 목숨을 하찮게 여기는 일은 인간성을 황폐시켜, 결국 그 피해가 나에게 돌아오게 된다. 자명한 원리다.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는 `한 나라의 위대함과 도덕적 진보는 그 나라에서 동물이 받는 대우로 가늠할 수 있다`고 했다. 간디가 위대한 것은 보편적 인류애를 동물까지 확장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려운 이웃을 돌아보게 되는 연말, 주변 동물들의 호소에도 귀 기울여 보는 것은 어떨까. 조정미 대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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