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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가산책] AI 시대의 문화

2019-12-10기사 편집 2019-12-10 08: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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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사진1류달상 작가
바둑 기사 이세돌의 은퇴는 인공지능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계기를 준다. 30대의 이 명민한 기사는 그의 은퇴를 자극한 것이 3년 전 알파고와의 대국이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알다시피 그는 한번 이기고 네 번 졌다.

로봇이란 단어가 처음 등장한 건 1920년 카렐 차페크의 희곡에서다, 거기서 인공지능은 인간에 향해 반란을 일으킨다. 그로부터 딱 백년이 되어가는 시점에 이세돌이 주목을 끄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인공지능에 대한 사람들의 주된 관심이 '이기고 지는', 다른 말로는 '지배관계'에 있으며 알파고와의 대국은 그 관심을 패배로 되돌려 주었다는데 있다.

인공지능시대의 입구에서 만물의 영장은 복합적인 감정에 처해 있다. 신의 모상(模像)인 우월한 종(種)은 미세먼지와 지구온난화, 가축의 대량 살처분 현장에서 인공지능에 자신들을 카피하며 예비전율중이다. 오해와 착각도 한몫 거든다. 인공지능은 감정이 배제되어 있다. 엄청난 속도를 제공하지만 자동차는 속도감을 느끼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술포비아가 작동한다. 감정을 지닌 인공지능을 향한 기대감이다. 영화 터미네이터나 아이 로봇 등의 넌센스, 기계가 사랑하고, 포용력을 보여주며, 운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모든 마음과정을 학습할 수 있다는 데 주장들이 맞선다. 가능하다는 편에 앨런 튜링이, 불가능하다는 입장에 괴델, 드레이퍼스, 서얼 같은 이들이 있다. 그러나 내 주제는 '왜 인간들은 터미네이터를 울게 하는가'이다.

기계에 감정을 주입하고 싶은 데에는 유서 깊은 인간심리가 들어 있다. 그 심리는 신에 복종하고자 하는 종교적 심리를 닮은 점이 있다. 어떤 가설은 종교적 심리가 다른 포유류들이 보여주는 순종 행위와 비슷하다고 한다. 사랑의 신은 웃고 있지만 인간의 편에서 싸워주는, 인간의 지능을 추월한 터미네이터는 그 불가능성까지 알기에 연민하며 우는 기계인 것일까.

이기고 지는 차원의 사유와 담론에 갇히면 우리는 기술의 미래에 대한 오해와 감정적 착각과 공포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주의 원자보다 무한한 경우의 수가 있다는 바둑에서 인간은 인공지능에 졌다. 앞으로도 많은 영역에서 인공지능에 추월당할 것이다. 예술의 영역에 인공지능이 진입하는 데에 민감한 이유는 인간의 마지막 자존심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엊그제 경북 구미에 '신호등 없는 AI 횡단보도'가 설치되었다. 인공지능이 글 쓰고 노래하고 그림 그리고 작곡하고 연주한다. 인공지능 음악인임을 자청한 사람도 있는데, 복잡한 관념을 버리고 인공지능과의 공존을 택한 경우다. 어느 것이 옳고 그른지 모른다.

삶은 누가 누구를 이기기 위해서 영위하는 것이 아니다. 인공지능이 인류에게 던지는 공존에 대한 가치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의식의 메타포가 누군가를 이기기 위한 내용과 형식으로 조립되어 있다면 우리는 영원히 AI포비아에서 벗어날 수 없다. AI 시대에 주어지는 성찰의 과제는 전적으로 문화적인 것이다. 문화적 성찰 안에서 AI의 선용 가능성은 더 넓고 크게 열릴 것이다.

류달상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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