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나라를 사랑하려거든 역사를 읽을 것이며 다른 사람들에게 나라를 사랑하게 하려거든 역사를 읽게 할 것이다."

대한독립의 꿈을 품은 28살의 청년이 이렇게 말했다. 역사를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계몽으로 해방을 이끌어내고자 했던 언론인이자 역사학자, 그리고 독립운동가 단재 신채호 선생(이후 단재)의 이야기다.

대전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인 단재는 1880년 12월 8일 충청군 회덕군 산내면(현 대전시 중구 어남동)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할아버지에게 한학을 배우며 성장한 그는 혼란에 빠진 조국을 위해 가시밭길을 택하기로 한다. 그의 독립투쟁노선은 급진적 폭력주의로 온건한 방법으론 독립을 쟁취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파괴, 암살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폭력저항을 지지했다.

단재는 1898년 18살의 나이로 성균관에 입교하지만 같은 해 11월경 독립협회 활동에 참여하다 투옥되기도 한다. 1901년엔 문동학원을 설립해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기도 하고 1904년에는 일본이 전국 황무지 개간권을 빼앗자 성토문을 작성해 일제와 친일 매국 대신들을 규탄하기도 했다.

결국 1905년 성균관 박사가 되지만 사직하고 이후 `황성신문` 논설위원으로 위촉되며 언론인의 길을 걷게 된다. 1907년 대한매일신보의 국채보상운동 당시 `담배를 끊어 국채를 갚자`는 논설을 황성신문에 실어 큰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 같은 해 그는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 활동하면서도 항일비밀결사단체인 신민회에 가입해 계몽운동과 독립운동을 동시에 펼쳐나갔다.

일제에게 국권이 찬탈된 1910년부터는 국내 독립운동이 어렵다는 신민회의 결정에 따라 해외에 망명해 독립운동을 지속해 나갔다. 중국 청도에서 1911년 블라디보스톡으로 옮겨간 그는 `대양보`, `권업신문`의 주필로 활약하며 독립 운동 방향을 제시해 교민 계몽에 앞장섰다. 이때 단재는 옛 고구려 땅을 답사하며 대고구려주의적인 역사의식을 갖게 되고 한국 고대사를 연구하며 민족사관을 형성했다.

그는 1936년 중국 여순감옥에서 순국하기 전 10여 년을 무정부주의자로서 살아간다. 1925년 무정부주의동방연맹에 가입한 그는 1928년 자신의 무정부주의 사상이 투영된 `용과 용의 대격전`이라는 소설을 집필하기도 했다. 다만 이 시기 한국에서 나타난 무정부주의 운동은 일제의 강압통치에 저항하고 자유를 옹호하는 형태로 나타난 것이 특징이다. 단재는 무정부주의를 지향하면서 자신의 민족주의를 한층 견고히 다졌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길을 꺾지 않았다. 무정부주의동방연맹의 자금 마련을 위해 활동하던 중 치안유지법, 유가증권 사기 위조 등으로 재판에 회부돼 10년형을 선고받은 그는 1930년 여순감옥에 수감됐다. 1935년 건강악화로 병보석이 가능했지만 그는 보증인 중 한 명이 친일인사라며 거절했다. 결국 1936년 2월 21일 순국하지만 눈을 감을 때에도 단재는 "일제가 내 유해를 밟는 것을 원치 않으니 나를 화장해 바다에 뿌려달라"고 부탁할 정도로 그는 올곧았다.

지난 8일 대전시는 3·1 운동,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며 단재 신채호 선생 동상 제막식을 열고 그의 정신을 기리는 자리를 가졌다. 그리고 그의 동상은 서대전공원에 자리를 잡아 우리에게 역사를 되새겨주고 있다.

평생을 언론인으로서 국민 계몽에 앞장서고 역사학자로서 고대사의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으며 독립운동가로서 자신의 몸을 바쳐 조국을 되찾는 데 헌신했던 단재 신채호 선생. 그의 얼과 정신은 그가 순국한지 80여 년이 지났어도 아직 이 땅에 살아숨쉬고 있다. 이수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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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일 서대전공원에 세워진 단재 신채호 선생 동상. 사진=윤종운 기자
지난 8일 서대전공원에 세워진 단재 신채호 선생 동상. 사진=윤종운 기자

이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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