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익 한국원자력연구원 미래전략연구부장
정익 한국원자력연구원 미래전략연구부장
단풍이 온 산을 물들이는 계절이다. 늦가을 단풍은 봄의 꽃보다 더 붉다고 노래한 시인도 있었다. 멋없는 과학자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가을이 돼 일조량이 줄어들면 식물의 광합성을 담당하는 엽록소가 줄어든다. 초록색을 띄는 엽록소의 양이 적어지는 대신 숨어있던 다른 색소들이 나타나면서 단풍이 시작된다. 일교차가 더 커지면 낮에 광합성으로 만들어진 당분이 밤에 호흡으로 소비되지 않고 남게 되고, 붉은색을 띄는 색소를 더 많이 만들어내어 완연한 단풍을 즐길 수 있게 된다. 즉 단풍은 식물의 대사활동으로 생기는 현상이다. 바꿔 말하면 식물의 생리작용을 조절하면 계절에 상관없이 단풍을 즐길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단풍 구경 오는 수많은 풍류객들은 모르고 지나치기 쉽지만, 우리나라 대표적인 단풍 명소인 내장산 입구에는 방사선 응용기술 연구의 핵심인 첨단방사선연구소가 있다. 가난했던 우리나라의 원자력 기초연구는 방사선을 이용한 품종 개량, 토양 및 비료 개선 연구와 같은 농학에서 출발했다. 연구 초기인 1970년대에는 식량 자급이라는 절체절명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벼, 보리, 콩, 토마토, 고추 등의 품종 개량에 집중했다. 특히 벼는 방사선 조사와 세포 배양기술을 이용해 아미노산 함유량이 높은 품종이나 염도가 높은 간척지에서도 자라나는 품종까지 개발해 보급했다. 그 중에서 `녹원찰벼`, `흑선찰벼` 등은 현재 여러 지자체의 특산품으로 자리 잡았다.

2000년대부터는 방사선 육종기술의 연구대상이 식량 외에도 국화, 무궁화, 잔디 등 화훼류와 케나프(Kenaf·양마(洋麻)) 같은 기능성 작물로 확대됐다. 분재에 알맞은 `꼬마`라는 이름의 작고 귀여운 무궁화 품종을 개발하고, 세계 3대 섬유작물 중 하나인 케나프의 신품종을 개발해 민간 기업에 기술을 이전하기도 했다. 식량, 원예, 특약용 작물 외에도 해조류, 버섯류 등 인류의 미래 식물자원 개발에도 앞장서고 있다.

우리나라의 방사선 연구는 방사선 육종연구 뿐 아니라 방사선이 식물에 끼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까지 범위를 넓히고 있다. 방사선에 의한 식물의 생리현상과 영향에 대한 연구는 많은 잠재력을 갖는다. 방사선을 이용해 식물의 유전자를 조절하고, 특별한 기능을 가진 특수 식물의 조직배양 성공률을 높이는 기술 등이 이에 해당한다.

예를 들어 잔디에서 천연 항산화물질인 메이신을 합성하는 유전자를 분리·정제해 피부 노화와 미백에 효능이 있는 항산화 기능성 화장품으로 상품화했다. 현재는 방사선에 반응해 유전자를 발현시키는 특정 부위를 확인하기 위해, 방사선에 대한 반응을 분자 수준에서 분석하는 오믹스 데이터 기반 식물 반응연구, 영향연구 등을 수행하고 있다. 아울러 식물이 만들어 내는 유용한 물질 즉 2차 대사산물(secondary metabolite)이 만들어지는 메커니즘을 방사성동위원소를 이용해 규명하는 연구를 수행하며 생리 활성화 물질과 스트레스와 오염에 대응하는 유전자원 발굴에도 힘쓰고 있다.

현재의 방사선 연구는 단순히 우수한 품종을 만들어내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방사선을 이용해 유전자 단위에서 식물을 연구하고 인류가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물질을 적극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현대사회에서 종자는 논밭이 아닌 실험실에서 만들어진다. 경험 많은 농부의 감으로 가지를 접목해 우수한 종자를 길러내는 일은 과거가 됐다. 훈련된 과학자들이 연구를 통해 유전자를 변형해 완전히 새롭고 인류에 이로운 품종을 개발한다. 유전형질을 개량해 만들어낸 식물과 유전자는 그 자체로 생물 자원일 뿐 아니라 일종의 무기가 돼버렸다. 종자 산업이 1차 산업이 아닌 4차 산업 시대에도 유망한 미래 산업인 이유다. 그리고 방사선 기술은 종자 산업에서 가장 유용한 첨단 도구다. 상상 속의 푸른 장미는 유전 공학의 힘으로 점차 현실이 되고 있다. 방사선 기술이 발달한 가까운 미래에는 봄 꽃보다 붉은 단풍을 사계절 내내 볼 수 있는 길이 열릴지도 모른다.

정익 한국원자력연구원 미래전략연구부장

<저작권자ⓒ대전일보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저작권자 © 대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