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의 근대문화유산 답사기] ⑭ 아산 공세리 성당

공세리 성당. 사진=아산시 제공
공세리 성당. 사진=아산시 제공
아산 공세리 성당은 한국 카톨릭교의 3대 요람지의 하나로 손꼽히는 내포지역에 위치해 있다. 1922년 건립된 충남 최초의 양식성당 건축물이다. 아산지역은 일찍이 천주교가 빠르게 확산되었고 공세리 지역이 천주교의 중심지로 자리하게 되었다. 조선시대 때 아산, 서산, 한산, 청주, 옥천 등을 비롯해 40개 고을의 조세를 쌓아두던 공세곶창이 있었던 곳이다. 오랜 세월의 흔적을 담담한 모습으로 보여주는 성당은 100여 년의 시간을 보내온 역사의 장소이기도 하다. 공세리 성당은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아 1998년 도지정문화재 기념물 제144호로 지정됐다.

△충남 최초의 양식성당=한국 카톨릭교의 3대 요람지의 하나로 손꼽히는 내포지역에 위치한 공세리 성당은 1899년 구 성당이 건립된 이후 초대 본당 신부이자 제3대 본당 신부였던 드비즈 신부에 의해 1922년 건립됐다. 130여평 규모의 충남 최초의 양식성당 건축물로 본당, 사제관, 피정의 집, 화합실 등이 건물이 있고 병인박해 때 순교한 3인의 묘가 조성돼 있다.

공세리 본당은 1895년 5월 5일 창설되었으며 보대 본당신부는 드비즈 에밀리오 신부가 임명되었다. 하지만 덕산 양촌 본당 신부의 사정으로 드비즈 신부의 공세리 도착은 지연되었고 1895년 6월 10일 드비즈 신부가 걸매나루에 도착하여 공세리 281-1번지에 10칸 기와집을 지붕과 방, 마루를 개조해 성당으로 꾸미면서 본격적으로 운영되기 시작했다.

1897년 드비즈 신부는 공세리 제3대 본당 신부로 재 임명되어 부임하였는데 이후 신붕산을 매입하여 사제관 공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이 토지는 국유지로서 조정에서는 매매할 수 없는 국유지를 지방탐관오리가 몰래 판 것으로 이의 반환을 요구했다. 하지만 정식으로 돈을 주고 구입한 것으로 이의 잘못은 관리에게 있다는 의견을 토대로 거절하였고 이후 1898년 6월 25일 뮈텔 주교가 드 플랑시 공사 면담후 대지반환요구 사건은 종결되었다. 1920년에 이르러 기존의 한옥성당이 증가한 신도를 수용하기에 협소해짐에 따라 새로운 성당 건축이 요구되었고 현 위치에 성당의 건립이 이뤄졌다.

△조선시대 설치된 조창(漕倉)=공세곶창은 영광의 법성포창, 익산의 덕성포창, 강음의 조읍포창과 더불어 4대 해군창의 하나였다. 공세곶창은 15세기 후반 이래 아산만 일대의 유일한 조창으로서 조선시대 충청도 서부 권역의 세곡을 수납해 한성의 경창으로 운송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조선 초기부터 운영된 공세곶창은 현재 아산 지역에 해당하는 아산현·온수현·신창현 등 3개 고을을 포함해 총 17개 고을의 세곡이 모이는 곳이었다. 성종 8년(1477년)에는 인근 범근천(현 당진시 우강면 강문리)에 있던 조창을 폐지하고 그 역할을 공세곶창으로 통합했다. 공세곶창에는 기존 17개 고을과 범근천 조창 21개 고을, 옥천·평택 등 총 40개 고을의 세곡이 모여들었다. 금산군을 제외한 현재 충남 지역 전체와 평택·청주·문의·옥천 등 경기·충북 지역 일부가 포함된다. 중종 18년(1523년)에는 창고 80칸을 짓고 공진창이라 했다. 화폐가 본격 유통되고 조세금납이 이루어지면서 곡식 수납의 비중이 감소하며 공진창의 기능도 점차 축소됐고 19세기 중반에는 조창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고 방치됐다. 현재 공세곶창성 일부가 남아 있고 그 앞에 해운판관비 등이 세워져 있다. 하지만 조선시대 아산만 지역의 대표 조창으로서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갖고 있다.

△화려한 건축과 천주교 순례길=한국전쟁 중에 인민군에게 점거당해 공회당으로 쓰이기도 했던 성당은 1970년 신자가 증가하자 북측의 제대 쪽을 헐어내고 317㎡를 증축해 495㎡로 늘려 오늘에 이른다. 공세리 성당은 천주교 초기 순교성당이라는 종교적 가치도 훌륭하지만 소박한 정신과 우아한 건축적 미감이 어우러져 만들어낸 단정한 아름다움도 뛰어나다.

공세리 성당은 1922년 연와조 고딕양식의 근대식 성당으로 세 번째 완성됐다. 본당은 1층 적벽돌 건물로, 정면에는 높은 첨탑이 있고 내부에는 무지개 모양의 회색 천장이 마련되어 있다. 사제관은 2층 벽돌 건물로, 정면이 팔자(八)계단으로 2층을 오르게 되어있으며 계단 아래에 1층 입구를 두었다.

현 공세리 성당 평면은 `T`자형으로 되어 있다. 전면에 신부가 미사를 집전하는 제대를 두고 회랑을 구분하며 나열된 기둥에 의해 3랑식으로 구획된다. 내부 천장은 반원형 베렐 볼트로 각 베이마다 회색 벽돌처럼 표현한 목재 리브가 있다. 측랑 부분은 평천장으로 마감, 목재판을 그대로 노출시켜 고딕성당이 갖는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공세리 성당은 인근 당진의 솔뫼성지와 신리성지, 예산의 여서울성지, 홍성의 홍주성지, 서산의 해미성지와 함께 천주교 순례길의 성지다. 공세리 성당에서 솔뫼성지를 잇는 길이 천주교 순례길을 여는 첫 구간이다.

△순교자 32위 모신 성지=천주교인들에게 공세리 성당은 중요한 곳이다. 이곳이 순교성지이기 때문이다. 한국 천주교회는 4대 박해(신유·기해·병오·병인)를 겪으며 1만 여명의 순교자를 낳았다. 이들 대부분은 충남 아산, 서산, 당진, 홍성, 예산 등 내포지방에서 나왔다. 내포지방은 일찌감치 중국과 교역이 활발했다. 천주교도 다른 지방에 비해 먼저 전래됐다. 공세리 성당이 위치한 이곳은 내포지방의 입구로서 내포지역은 한국 천주교회의 `신앙의 못자리`라 불릴 만큼 한국천주교역사에 중요한 중심지이다. 공세리 성당에는 1801-1873년 신유·병인박해 때 이 지역에서 순교한 32위의 순교자들을 모시고 있는 순교성지로서 더욱 경건하고 의미 있는 곳이다. 황진현 기자

<저작권자ⓒ대전일보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저작권자 © 대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