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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칼럼] 기억하는 법

2019-11-15기사 편집 2019-11-15 07:3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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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사진1김종광 소설가
스무 살 때 강원도의 어느 호수 안에 있는 무슨 섬으로 엠티를 갔었다. '바퀴벌레 한 쌍'이라고 불리던 두 친구의 언약식을 치러주었다. 너무나도 생생한 추억이었다. 어이없게도 나만 그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동기들에 의하면, 우리는 그곳에 엠티를 간 적이 없었다. 대학 다니는 내내 '언약식' 따위를 치러준 커플이 전혀 없었단다. 순전히 나만의 기억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도 나는 그 기억을 믿고 있다.

그런데 만약 그것이 정말 없었던 일의 기억이라면? 아마도 공상이 하나의 이야기처럼 기억으로 자리 잡은 것일 테다. 꿈이었을 수도, 상상한 스토리일 수도, 망상일 수도 있다. 엠티 가서 언약식 하는 이야기, 얼마든지 공상할 수 있다. 내 바람의 변형이었을 수도 있다. 언약식 같은 특별한 체험을 해보고 싶었던 어쭙잖은 청춘의 간절한 몽상이, 시간이 지나는 동안, 실제기억처럼 대뇌피질 어딘가에 박힌 것이다.

또 다른 가능성이 있다. 내가 들었던, 보았던, 읽었던 장면들이 한 줄기로 꿰어져 내가 겪은 일로 둔갑한 것. 누군가에게 '바퀴벌레 한 쌍'으로 불리는 커플 얘기를 들었고, 어느 드라마에서 대학생들이 언약식 치르는 장면을 보았는데, 그것을 조합하여 내가 두 눈으로 직접 본 일로 믿어버리게 된 것이다.

나만 이렇게 이상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확신하지만, 어쩌면 실제로는 없었던 일일 수도 있는 기억. 나처럼 극단적인 기억의 모순은 드문 일일지라도, 서로 다른 기억의 충돌은 흔한 일일 테다.

남자들의 군대 얘기가 그토록 길고 격렬한 것은 기억의 불일치 때문인 경우가 많다. 수십 년 만에 만난 동창들 모임이 학교 때 얘기만으로 밤을 새울 수 있는 것은 기억들의 중구난방 때문이다. 분명히 같은 사람들이 같은 일들을 겪었는데 서로 다르게 기억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기억을 대하는 태도다. 나처럼 내 기억이든 타인의 기억이든 모조리 의심하는 이도 있다. 대개는 내 기억도 타인의 기억도 반쯤은 맞고 반쯤은 틀리다는 식의 열린 자세를 유지한다. 그래야 그 판이 유지되니까. 물론 판이 깨지든 말든 자신의 기억을 맹신하는 이들이 있다. 내 기억은 무조건 틀림없고, 타인의 기억은 무조건 틀렸다는 거다. 이런 사람이 둘 이상이면 필시 고성이 오가게 된다.

왜 기억을 나누다가 싸우지는 않더라도 마음이 상하게 되는 걸까. 나는 타인에게 잘 기억되고 싶었던 것일 테다. 이를테면 일관 되게 괜찮은 언행을 한 사람으로. 내 기억으로 나는 일관 되게 점잖게 말하고 행동했는데, 타인이 몹쓸 언행불일치자로 기억하고 있으니 언짢아질 수밖에 없다.

어쨌든 오래도록 다채로운 기억은 사람의 것이었다. 실제기억이든, 공상기억이든, 표절기억이든 내가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기억을 스마트폰이 하는 세상이 되었다. 스마트폰에 담아버리면 끝인 거다.

물론 제일 고통 받게 될 사람들은 특권층이나 연예인처럼 온 국민이 다 아는 분들, 이른바 '공인'일 테다. 공인의 말과 행동은 실시간으로 국민에게 기억 된다. 하기는 연예인들은 잘 모르겠지만 특권층은 별로 문제될 게 없을 수도 있겠다. 그분들의 주특기가 '모르쇠'와 '아니라고 딱 잡아떼기'와 '내로남불'이니까. 그래도 과거처럼 대놓고 적폐를 저지를 수는 없겠다. 딱 잡아떼고 말면 되는 언행도 있겠지만, 감옥에 가야할 언행도 있으니까.

법으로 처벌 받아 마땅한 사람들이 왜곡하거나 조작하거나 삭제한 기억을 바로 잡아주거나 복원해주는 등 스마트폰의 순기능은 상당하다.

하지만 인간적으로 보면 서글픈 일이다. 반주 없이도 외워 부르는 노래가 수두룩하던 사람이 노래방기계 없이는 노래를 못 부르듯, 그렇게 길을 잘 찾던 사람이 내비 없으면 길치가 돼버리듯, 스마트폰이 없으면, 그때 내 마음을, 내 생각을, 풍경을, 타인의 언행을 떠올리지 못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어떤 기억일지라도, 기억 행위이야 말로 사람을 사람답도록 했다. 기억하는 법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기억하는 법을 잃어버리게 될 지도 모른다.

김종광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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