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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아픔·추억 공존…새 숨결 불어넣는다

2019-11-11기사 편집 2019-11-11 17:3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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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의 근대문화유산 답사기] ⑫ 서천 장항제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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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항은 금강의 문턱으로 백제 기벌포의 한을 되새기고 있는 항구. 기벌포를 안보고 장항을 볼 수 없고, 백제를 알 수가 없지. (중략) 멀리 제련소의 연기 없는 연돌이 하늘에 떠 있고 (중략) 역전 슈퍼나 식당도 옛날 그대로요, 길목 신부락에 이르는 골목도 옛날 그대로 조용히 잠들어 있다." 장항에서 나고 자란 국내 최고의 소설가이자 국문학자인 구인환의 작품 '기벌포의 전설'에 묘사된 장항의 옛 모습이다. 백제의 한을 머금고 유유히 흐르는 금강의 하구 장항에 이르러 전망산과 후망산 사이로 빠져 서해의 대해에 스스로를 던진 곳. 장항 제련소가 있는 포구 기벌포. 그곳에는 문학 뿐만 아니라 우리네 근현대사가 오롯이 녹아 있다.

◇장항제련소 굴뚝 = 전망산 바위산에 자리한 장항제련소는 지난 1936년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올해로 83해 째를 맞이하고 있다. 1930년 장항항이 개항하고, 1931년 장항선 철도가 들어서며 수많은 금과 은, 식량들이 수탈됐으며, 장항제련소도 국제 통화수단인 금을 생산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장항제련소의 전성기는 광복 후에 찾아왔다. 광복 후 장항항이 국제항으로 승격하고, 장항제련소는 한국광업제련공사로 재설립됐다. 이후 1971년에 민영화, 1974년 1만5000t, 1976년 5만t 규모로 확장하면서 우리나라의 산업화의 한 축이 되었다. 제련소 직원에게 서로 딸을 시집보내려고 안달이 났다는 얘기가 있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제련소로, 장항으로 몰려들었고 1960-70년대 경제발전에 큰 역할을 수행했다. 하지만 인기도 잠시, 장항제련소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의 환경문제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면서 1989년 장항제련소는 폐쇄의 길을 걷게 됐다. 몰려들었던 사람들은 금세 다시 떠나갔고, 지금은 조용하고 한적한 시골 마을로 남게 되었다. 구인환은 작품 속에서 "옛날 항구의 잔교(殘橋)나 제련소로 직행하던 선로가 광석이 들어오지 않아 철로길만 골동품과 같이 남아 있는 장항이 아직도 발전의 그늘에 가려 잠을 자고 있다. 6·25 전쟁 때에 잉여농산물이 들어와 북적대던 선창가에 하구둑에 밀려 그 회수가 작아진 도선(渡船)만이 외롭게 갈매기를 벗하고 있을 뿐이다"라고 말한다. 이제 더 이상 연기를 내뿜지는 않지만 제련소가 우리나라의 근·현대사에 주는 상징성은 남다르다.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 당시 중요 지형물의 역할을 수행했고, 한때 대통령이 찾아왔으며, 초등학교 교과서 표지를 장식하기도 했다. 또한, 훌륭한 문인들과 그들의 문학작품에도 제련소와 장항의 모습이 그려져 의미를 더한다.

◇젊은날의 꿈이 서려있는 그리움의 기억 = 구인환 소설을 읽으면 그가 그리는 어린 시절 장항의 모습을 어렴풋하게나마 그려볼 수 있으며, 아직까지도 소설가의 머릿속에 남아있는 굴뚝 연기의 잔상들과 장항의 풍경들이 독자에게 전달되는 듯하다. 서천 출생의 시인 나태주에게도 장항제련소는 추억이 가득하다. 시인의 작품 '막동리를 향해서'에는 '산 위에 올라가면 장항제련소 굴뚝의 연기가 하늘에 나래 편 커단 새 같이만 보였었지. 지게 끝에 걸리는 마을연기 매캐한 고랫재 내음 벼타작 마당에서 부르고 대답하는 사내들 힘찬 목소리'라는 구절이 담겨 굴뚝의 연기를 떠올리면 함께 되살아나는 기억들이 시인의 젊은 날, 꿈과 그리움, 희망을 투영하고 있다. 또한 소설가 박범신의 기억에도 장항제련소는 선명하게 남아있다. 소설 '소금'에는 '아버지는 그 무렵 서천 죽산리에서 염전을 일구고 있었다. 맞은 편으론 군산항이, 왼쪽으로는 장항제련소의 드높은 굴뚝이 빤히 건너다 보는 곳이었다. 그 곳에선 하루 종일 혼자 있어도 심심하지 않았다'는 내용이 나온다. 아버지가 열심히 일하던 염전의 모습 너머로 묵묵히 연기를 내뿜으며 산업화를 이끌어간 장항제련소의 굴뚝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문학에서는 장항과 제련소의 풍경에 대한 예찬과 추억에만 그치지 않고 때로는 애틋한 사랑의 공간으로도 표현된다. 곽재구 시인의 '포구기행'에서는 장항과 군산의 사이를 이렇게 나타냈다. '나는 장항과 군산 사이를 오가는 여객선을 타면서 이 두 도시에 사는 연인들은 서로 이별하기 힘들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15분인 편도 뱃길을 바래다주며 헤어지기가 싫어서 다시 돌아오는 배를 함께 타고 막상 한쪽의 도착지에 이르면 또 다시 헤어지기가 싫어서 맞은 편의 항구로 함께 가고.' 누군가에게는 추억이, 누군가에게는 인생이, 누군가에게는 역사의 이름 장항, 그리고 제련소. 지금은 불 꺼진 제련소와 연기가 피어오르지 않는 굴뚝, 그리고 침체되어 있는 작은 어촌 마을 장항이 되었지만 문학가들이, 그리고 장항을 지켜봐온 많은 사람들의 기억 하나하나를 통해 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생명력을 불어넣어 새롭게 활용해야 할, 그리고 후손들에게 물려줘야 할 근대 유산이다.

서천=최병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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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사진2사진으로 본 서천의 옛 모습(장항제련소 동 생산 현장을 방문한 박정희 의장)-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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