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연 충남대 교수
박수연 충남대 교수
전태일이라는 이름을 모르는 한국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는 한국 사회가 경제발전이라는 화두를 만들어 지상 최고의 목표로 삼고 달려가던 시대에 일하고, 가난과 사회적 소외 때문에 고통 받았다. 그러나 스스로를 더 큰 고통 앞에 밀어 올려 함께 고통받던 사람들의 환한 미래를 열어보려 했던 청년이다. 1970년 11월 13일 그는 노동자의 권리를 요구하는 시위를 막아선 경찰과 업자들 앞에서 자신의 몸에 불을 붙였다. 그가 외친 것은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다", "노동 3권 보장하라"였다. 그의 죽음은 한국사회의 어두운 그늘을 순식간에 폭로해 버렸고, 박정희 정권은 사회적 저항을 봉쇄하기 위한 더 억압적인 통치체제로 나아갔다. 그러나 사람들은 더 단단한 행동으로 결집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그 결단 밑에는 전태일의 결단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공식 학력이라곤 초등학교에서 배운 것이 전부였기 때문에 그는 죽는 순간에도 더 많은 앎을 열망했고, 그래서 한자투성이 법조문을 읽어줄 수 있는 대학생 친구를 얻기를 소망하기도 했다. 그 열망들은 그의 계급 상승 욕망을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누구에게도 도움을 받을 수 없었던 그의 가난한 친구들과, 가난한 자를 더 가난하게 만들어버리는 한국 자본주의의 헐벗은 시대를 위해 죽기로 결심하면서 이렇게 썼다. 그의 육성이 더 많은 의미를 전달해줄 것이므로 여기에 인용해둔다.

"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워했던가? 지금 이 시각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렸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생을 두고 맹세한 내가, 그 많은 시간과 공상 속에서, 내가 돌보지 않으면 아니 될 나약한 생명체들.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너희들은 내 마음의 고향이로다."

이 `완전에 가까운 결단`과 한국사회의 모순을 은폐하기 위해 당시 정부는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에게 어머어마한 금액 등을 통해 회유했으나, 이 여사는 아들의 결단을 따라 모든 제안을 거부했다. 어머니의 마음에는 스스로를 불태워 노동 3권을 보장하라고 외쳤던 아들의 고통스러운 마음만이 존재했던 것이다. 종로에는 그가 몸에 불을 붙임으로써 한국의 한 시대를 불살라버리고 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불태웠던 자리에 작은 표식을 마련해 그 뜻을 기억하고 있다.

지난 1일에는 전태일기념관에서 `나와 같은 전태일-나와 다른 전태일`이라는 주제의 노동학술토론회가 열렸다. 참석한 여러 인사들이 동의한 것은, 전태일을 저 과거의 기념비적 위치에서 내려오게 해 다시 그의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되살리면서 도래할 앞날의 사람들을 향해 나아가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한국 노동운동의 기념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살아서 우리에게 오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노동운동은 스스로 기념비가 되는 일을 벗어나서 언제나 더 낮아지려는 결단을 통해서만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내년은 그의 50 주기다. 한국 노동운동의 힘찬 몸짓도 마찬가지로 오랜 시간을 스스로 단련시켰다. 전태일은 자신이 아니라 그의 가난한 친구들을 위해 스스로를 불태우며 다시 오고 있을 터이다. 항용 느끼는 것이지만, 전태일을 생각할 때마다 세계는 항상 더 많은 노력 속에서만 환해지리라는 또다른 생각이 나타난다. 그를 생각하면 나는 항상 부족하고 결핍돼 있으며 게으른 사람이 된다. 지난 1일의 학술토론에서는 의미심장한 주장이 하나 있었는데, 돌봄으로서의 노동과 노동문학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이 세계의 모든 삶의 주체를 둘러싼, 노동의 주체를 가능하게 만든 돌봄의 손길을 돌아봐야 한다는 생각이다. 돌보는 손길. 실로 전태일은 지금도, 그가 꿈꿨듯이 그의 친구들을 돌보기 위해 돌아오고 있는 중일 것이다. 박수연 충남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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