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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광장]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출현한다

2019-11-08기사 편집 2019-11-08 07:4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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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이성적 군중심리가 전체주의 토양

첨부사진1송연순 편집부국장 겸 취재 1부장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출현한다."

스페인의 궁정화가였던 프란시스코 드 고야(Francisco de Goya)의 판화 작품 하단에 새겨져 있는 글귀다. 고야가 50세 무렵인 1799년에 그린 이 그림은 '로스 카프리초스(Los Caprichos·변덕)'라는 연작 화집에 실린 43번째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지친 듯 책상에 엎드려 있는 남자, 박쥐와 부엉이처럼 보이는 기괴한 새들, 날카로운 눈빛의 살쾡이 등을 통해 18세기 스페인 사회의 정치적 상황을 풍자적으로 그려냈다.

고야가 살았던 1810년과 1820년대 사이 스페인 사회는 정치적으로 혼란기였다. 1808년 나폴레옹 군대의 침략으로 끔찍한 전쟁의 고통을 겪은 스페인은 왕당파와 자유주의자 간 싸움이 그치질 않았다. 프랑스의 계몽주의 영향을 받은 고야는 집단폭력과 국가의 권력남용을 비판했다. 그는 그림을 통해 '이성'이라는 이름 뒤에 가려진 '광기'를 표현했다. 이성은 현실의 개선에 반드시 필요하지만 적절히 제어되지 않으면 '괴물'을 낳게 된다는 점도 강조했다.

'조국 사태'로 촉발된 비(非) 이성적 '광장정치'가 우리 사회의 상식과 이성을 마비시키고 있다. 편향된 이념적 사고와 혹세무민의 선동에 전혀 의문을 갖지 않고 맹목적으로 추종할 때 전체주의라는 괴물이 꿈틀거릴 수 있다.

대다수가 전체주의는 20세기의 산물로서 역사 속에서 이미 막을 내렸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법의 가치가 무시되고 사리사욕에 눈먼 무능한 정치인들의 득세로 정치혐오증이 만연될 때 다시 수면 위로 고개를 내밀게 된다,

전체주의라는 괴물은 사람들 스스로 자유로부터 도피하는 비이성적 군중심리에서 나온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 '자유로부터의 도피(Escape from Freedom)'라는 책에서 "모든 인간은 원초적으로 고립의 공포감을 갖고 있다. 그 공포감을 줄이기 위해 자유를 포기하고 강한 권력에 의존하게 된다"며 독일 나치즘의 출현을 심리적인 측면에서 분석했다.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도 그의 저서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전체주의는 일부 몰지각한 지도자에 의해 탄생한다기보다 '대중들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괴물'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아렌트는 '전체주의 정권이 몰락한 이후에도 전체주의는 강한 유혹의 형태로 생존할 것'이라고 했다. 트럼프 미 대통령, 시진핑 중국 주석, 푸틴 러시아 대통령, 아베 일본 총리 등 21세기 신(新) 권위주의자들의 행태가 바로 아렌트의 '강한 유혹'과 연결되는 것 같다.

문재인 대통령이 9일로 임기 반환점을 돈다. 문 대통령은 적폐 청산과 공정·정의의 가치를 강조해왔다. 하지만 이른바 '조국 사태'로 불거진 공정성 논란으로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는 화두는 퇴색해버렸다. 대의(代議) 민주주의가 실종되면서 주말마다 광화문과 여의도 광장에는 양 극단으로 갈라진 '성난 군중(Angry mob)'들로 채워지고 있다. 상식과 규범, 가치관도 무너지고 무엇이 진정 옳고, 그른 것인지 판단마저 혼미해지는 양상이다.

이런 가운데 청와대와 여권은 검찰개혁을 내세워 고위공직자 비리 수사처 (공수처) 설치를 밀어붙이고 있다. 검찰개혁은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방식 등에 문제가 있어 보인다. 검찰개혁의 핵심은 수사권과 기소권의 분리에 있다. 그런데 검찰을 개혁한다면서 대통령 직속 사정기관인 공수처에 수사권과 기소권을 모두 부여한다는 것은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이다. 일정 직급 이상의 고위 공직자를 수사·기소하는 공수처는 전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다. 사정기관인 공수처가 비리 척결보다는 사법권 장악 등 정치적으로 악용될 때 괴물이 될 수 있다.

보다 정의롭고 공정한 사회를 만들고자 한다면 어떤 이념이나 지지자를 맹목적으로 추종하기보다는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국민 다수의 이성이 깨어나 있지 않다면 괴물은 언제든 출현할 수 있다. '사유하지 않는 한 악(惡)은 늘 우리 곁에 있다'는 아렌트의 경고가 가슴에 와 닿는다. 송연순 편집부국장 겸 취재 1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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