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이 둘은 누가 더 잘 그리느냐를 두고 일종의 시합을 했는데, 제욱시스는 자신이 그린 포도송이가 탐스런 포도나무 그림을 보여줬다. 이 때 여러 마리의 새가 진짜 포도송이로 알고 그림에 날아와 부딪혔다. 제욱시스는 의기양양하게 자연(새)의 눈을 속인 자신의 그림 솜씨를 뽐냈다. 그리고 그는, 휘장으로 덮인 파라시오스의 그림을 빨리 보자며 그림을 덮고 있는 휘장을 걷어 낼 것을 재촉했다. 그런데 바로 그 휘장이 파라시오스의 그림이었다! 제욱시스의 그림은 새, 즉 자연은 속였지만 파라시오스는 자연을 속인 뛰어난 화가의 눈을 속인 것이다. 이후 `좋은 미술은 현실의 충실한 재현`이라는 명제가 이천년 가까이 미술의 역사를 군림했다.
그러나 이 논쟁의 핵심은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제욱시스의 포도송이와 파라시오스의 휘장 그림이 결국 포도송이도 휘장도 아닌 그저 `이미지`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진짜가 아닌 이미지였기에 새는 포도를 먹을 수 없었고 제욱시스는 휘장을 걷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미지`는 마치 `유령`과 같다. 껍질을 가졌으면서도 알맹이는 없고, 그 알맹이, 즉 실재가 없어서 그 존재와 정체는 모호한 유령 말이다. 순간적으로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우주의 모든 사건 혹은 자기 동일성이 없는 복제를 뜻하는 시뮬라크르(simulacrum)의 어원이 유령이고, 죽은 이의 얼굴 본을 뜬 밀랍 주조인 이마고(imago)가 이미지의 어원인 것을 떠올리면 이미지와 유령이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가상현실과 현실의 문제를 다룬 영화 `매트릭스`(1999)에서, 주인공 키아누 리브스가 속이 비어 표지만 남아 있는 장 보드리야르의 책 `시뮬라시옹`(1981)을 꺼내는 장면이 우리 기억 속에 선명한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책은 책이되 읽어야 하는 내용은 텅빈 채 표지만 책인 책은 정말 책일 것일까. 마치 제욱시스의 포도송이와 파라시오스의 휘장 그림처럼, 내용 없이도 표지만으로 책일 수 있는 유령과 같은 `이미지`는 이렇게 늘 우리를 당혹스럽게 한다.
문제는 오늘날 우리가 이런 `이미지`들에 둘러싸여 있다는 사실이다. 전쟁과 테러, 재해와 가난, 이주와 실향이라는 전지구적 난제와 해결되지 않는 동시대의 도시, 국가 등이 껴안고 있는 문제나 위기는, 보는 이 혹은 사회의 관점과 시선에 따라 현실 혹은 실재와는 전혀 다른 `이미지`로 탄생하여 우리와 우리 사회의 시스템 안에서 소비된다. 결국 실재로부터 떨어져 나와 그를 대체하고 현실에 선행하는 이미지들은 `유령`과 같이 껍질을 가졌으면서도 알맹이는 없고, 사건처럼 순간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기에 애초에 어떠한 힘과 위력을 지녔는지를 가늠하기는 어렵다. 근래,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를 유령 같은 이미지들의 둘러싸인 우리 현실이 새삼 두렵다.
김주원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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