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의 근대문화유산 답사기] ⑩ 당진 합덕성당

1929년 10월 9일 합덕 성당 봉헌식
1929년 10월 9일 합덕 성당 봉헌식
합덕성당은 당진시 합덕읍 시내에서 예당평야 방면으로 자동차로 5분 정도 가다 보면 만날 수 있다. 나지막한 언덕에 자리 잡은 합덕성당에 도착하면 종교를 떠나 거룩한 순교의 정신을 느끼며 경건한 마음과 평온한 감사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 합덕성당은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건물 형태로 바깥은 붉은 벽돌을 쌓았고 모서리는 회색 벽돌로 장식돼 있다. 마치 중세시대에 와 있는 듯하다.

◇충남 내포지역 근대기 천주교의 중심=조선시대 실학자 이중환은 그의 저서 택리지에서 `서쪽과 북쪽에 바다를 끼고 있으며, 동쪽에는 큰 들판이 있는 내포지역이 충청도에서 가장 좋다`고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 내포(內浦)는 오늘날 충청남도 서북부 지역을 지칭하는 말이며, 내포의 중심으로 언급된 유궁진(由宮津)은 오늘날 당진시 합덕읍 점원리를 일컫는다.

포구의 안쪽이라는 뜻을 지닌 내포는 현재와 달리 과거에는 조운선이 드나들고 중국과의 교역이 활발했던 해상무역의 중심지였다. 그렇다 보니 중국을 통해 신문물과 서양문화를 받아들이기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었다.

내포 지역 중에서도 중심지역으로 언급된 당진시 합덕읍 일원은 과거 버그내라고 불렸다. 합덕 읍내를 거쳐 삽교천으로 흘러 들어 만나는 물길이자 합덕 장터의 옛 지명이 바로 버그내인데, 오늘날 이곳에는 지난 2016년 아시아 도시경관상을 수상한 버그내순례길이 조성돼 있다.

한국인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신부(1821-1846)가 태어난 솔뫼성지를 출발해 천주교 박해기 신자들의 만남의 공간이었던 버그내시장과 합덕성당, 그리고 조선시대 3대 방죽 중 하나인 합덕제를 지나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샘인 원시장 우물터와 무명순교자의 묘역을 거쳐 제5대 조선교구장이었던 다블뤼주교가 거처하던 신리성지까지 이어진 13.3㎞의 이 순례길은 충남 내포지역의 천주교와 관련된 근현대 문화와 지역민들의 삶과 애환을 고스란히 녹여내고 있다.

보통 고종이 즉위한 1863년 이후를 우리나라의 근대화시기로 보지만 근대화시기를 정확히 구분하는 것은 옳지 않다. 1863년 그 이전부터 천주교를 비롯한 서양의 문화와 신문물들이 들어왔고, 이러한 시대적 변화 속에 근대화를 맞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의 근대화를 이야기하면서 천주교 박해를 빼 놓을 수 없으며, 한국 천주교의 못자리이자 요람이라 불리는 충남 내포지역의 천주교 역사를 빼고는 더더욱 근대기를 설명할 수 없다.

버그내 순례길의 천주교 문화유산 중에서는 단연 솔뫼성지의 명성이 높지만 아름다운 고딕양식의 합덕성당 또한 빼 놓을 수 없는 내포지역의 천주교 근대 문화유산이다.

◇천주교 대전교구의 모태, 독특한 건축형식도 이색적=솔뫼성지와 신리성지 사이에 위치한 합덕성당은 충청지역 최초의 본당으로, 천주교 대전교구 모든 본당의 어머니가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벽돌과 목재를 사용한 벽돌조 성당으로, 정면의 종탑이 쌍으로 돼 있는 것이 특징인 합덕성당은 이러한 역사적, 건축적 가치를 인정받아 1998년 7월 충청남도 기념물 제145호로도 지정되었다.

합덕성당 건물의 전면에는 3개의 출입구와 3개의 창이 있는데, 그 상부는 모두 무지개 모양의 아치로 되어 있으며, 외벽은 붉은 벽돌로, 창의 둘레와 종탑의 각 모서리는 회색벽돌로 쌓았다.

이 벽돌조 고딕 성당의 건축적 특징과 함께 아름다운 외관은 오늘날 천주교 신자뿐만 아니라 젊은이들이 찾는 핫플레이스가 되었다. 특히 당진에서는 아미미술관과 함께 셀프웨딩 장소로도 각광 받으며 신혼부부와 커플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

합덕성당은 2020년이 되면 설립 130주년을 맞이한다. 1890년(고종 27년) 예산군 고덕면 상궁리에 세워진 양촌공소로 출발해 초대 주임신부인 장 퀴를리에 신부가 1899년(광무 2년) 현재의 위치에 120평의 대지를 구입하고 이전하면서 합덕성당으로 이름을 바꿨다. 그 뒤 1929년 7대 주임 페랭(한국명 백문필) 신부가 현재의 벽돌조 고딕 성당을 신축했다.

2019년은 현재의 위치에 합덕성당이 세워진지 90년이 되는 해이다. 오래된 역사만큼이나 합덕성당의 이름도 여러 번 바뀌었다. 1960년 신합덕성당이 독립하면서 명칭이 구합덕성당으로 변경되었다가 1997년 다시 합덕성당으로 변경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종교를 넘어 지역의 문화가 된 합덕성당=성당이 있는 합덕지역은 천주교 신앙과 함께 신앙촌을 형성하면서 발전한 특별한 마을이다. 천주교 박해기부터 고아들을 돌보던 `영애회`를 이어받아 1969년까지 보육원이 운영되기도 했으며, `매괴학교`를 설립하고 공소마다 교리학교를 두어 남녀 학생들에게 신앙교육은 물론 근대식 교육을 실시한 지역이 바로 합덕이다.

그렇기 때문에 합덕에서 천주교는 단순히 종교가 아니라 일상이자 생활이었다. 1959년 사진으로 볼 수 있는 성체거동(성체를 모시고 성당 밖을 행렬하는 행사)은 합덕주민들의 마음가짐을 알 수 있으며, 지난 2017년 복원된 합덕성당의 종은 종소리에 일을 멈추고 경건하게 기도를 올렸던 합덕주민들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게 해준다.

합덕주민들과 성당이 어우러질 수 있게 한 데에는 페랭 신부의 역할이 컸다. 페랭신부는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으로 1921년부터 29년 간 합덕성당의 주임신부로 있으면서 내적 기틀을 다졌다. 가난한 주민들에게 고약과 안약 등을 직접 마련해 무료로 나눠 준 것으로 유명하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보좌신부를 피신시키고 1950년 8월 14일 성당에서 고해성사를 집전 하던 중 공산군에 피랍돼 학살되었다고 전해진다. 합덕성당에서는 선교자이자 순교자로서 지역주민과 함께한 페랭신부를 `착한목자 백문필 신부`로 기리고 있다.

◇외면 보다 내면의 미(美)=합덕성당은 자체로서의 매력이 많다. 성당 뒤편에는 우리나라 수리농경 문화를 엿볼 수 있는 박물관도 있고 최근에는 농촌테마공원도 조성돼 있어 고즈넉한 분위기 속에 산책하기 제격인 곳이 바로 합덕성당이다.

근대기로 접어들던 시기 조선에 학문으로 처음 소개되었던 천주교는 크고 작은 박해를 겪으면서도 평등사상과 박애주의를 조선사람 들에게 심어 주었다. 우리나라 천주교의 전파와 확산에 못자리 역할을 했던 충남의 내포지역은 박해의 역사를 오롯이 딛고 일어섰다. 이곳의 수많은 성지와 성당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로 꼽히는 합덕성당은 지역민들과 함께 성장하며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고 있다. 외면보다도 가난한 사람들을 보듬고 병자를 돌봐온 그 내면(마음)이 더 아름다운 성당이다.

차진영 기자

<저작권자ⓒ대전일보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저작권자 © 대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