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달상 작가
류달상 작가
요즘 며칠은 좋은 인연이 주는 행복감에 젖어든 날들이었다. 방송 진행을 하는 덕분에 훌륭한 분들을 대담자로 뵙는 행운이 내게 자주 주어진다. 경서도 소리의 명인 권재은 선생님을 뵌 것도 그중 하나다. 스튜디오에서 마주 앉는 순간, 나는 온후와 강직이라는 양가적 품성을 선생의 전 존재로부터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평생을 한길로만 걸어온 사람만이 낼 수 있는 체취랄까. 그런 깊이를 지닌 분들과 인터뷰를 진행하는 시간은 여러 힘들이 내면에서 싸우는 시간이다. 떨림과 설렘과 그것들을 진정시키려는. 삼십분 가까이 진행된 인터뷰가 끝난 다음 명인께서 내민 손이 너무나 부드럽고 따뜻해서 긴장에 젖은 땀을 쥔 내 손을 내밀기가 송구스러울 정도였다.

인터뷰를 한 다음날, 토요일이었던 그날, 나는 친구들과 의기투합하여 점심 막 지난 시간에 충주를 향해 자동차를 몰았다. 먼 남녘바다의 태풍이 내륙 깊은 곳까지 밀어올린 저기압대에서 종일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차 안에서 권재은 선생님과의 인터뷰를 다시 듣고, 비를 주제로 한 노래들을 스무 곡 넘게 이어 들었다. 음악을 좋아하는 친구의 선곡은 차 유리에 부딪히는 빗방울들의 촉감을 차안으로 불러들여 청각으로 전이시켜 주었다. 충주에서의 추억이 많은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의 단골 식당을 20여 년만에 찾아가 백숙을 먹고, 충주호반의 카페에 들러 막걸리와 파전과 인절미 구이도 즐겼다. 그러나 추억과 함께한 식도락은 충주행의 조연이었고 예고편이었다. 본편은 그날 저녁 그 작은 도시의 문화회관에서 열리는 소리공연이었고, 그 무대의 주연은 소리인생 50주년을 맞는 명인 권재은 선생이었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공연장 입구에서 반가운 얼굴을 만났다. 대전국악방송 고효상 프로듀서였다. 낯선 도시에서의 예기치 않은 만남. 예술과, 그 예술에 평생을 헌신해온 사람을 존중하고 사랑해서 먼 발걸음을 마다하지 않는 사람. 그런 만남과 사람이 가까운 주변에 있다. 얼마나 행복하고 좋은 인연인가.

두 시간 가까운 공연이 막바지로 갈 무렵, 명인 권재은 선생님이 노래가 아닌 말씀으로 마이크를 잡았다. 예술하는 사람이 인간문화재 프레임에 갇혀서는 안 된다는 경계, 지역에서 문화예술에 매진하는 것의 어려움과 그 어려움에 비례해서 일색(一色)이 아닌 이색(異色)의 소리를 추구할 수 있는 지역성의 소중함, 거듭 반복하고 되돌아가며 살아온 음악 인생 등에 관해 말씀하시는 목소리는 방송에서 그러셨던 것처럼 다시 온후하면서도 강직했다. 선생의 말씀들을 아우르는 온후함은 아픈 사람들을 향해 있었고, 선생의 말씀들을 관통하는 강직함은 사람들을 갈라놓고 찢어놓은 반예술적 가치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날 공연의 서두를 연 선생의 소리는 통일비나리였다. `백성들 죽을 고생 기상은 어딜가고 슬기마저 숨는구나, 최후엔 제 몸 잘라 남북으로 갈라서니 애통타 설운지고 통일이 지상과업 통일이 살길이다` 명인의 소리 안에는 아픈 사람들을 위로하고 찢긴 인연을 새롭게 이어주는 정서적 힘이 들어 있었다. 좋은 인연.

류달상 작가

<저작권자ⓒ대전일보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저작권자 © 대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